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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27. 2022

버지니아 울프의
실험적 모더니즘 소설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1927)>, 버지니아 울프,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2022)


세계고전문학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1권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의 실험적 모더니즘 소설 『등대로』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세계문학전집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를 펴낸다. 기존의 남성 작가 중심, 서구 중심의 세계문학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문학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달라진 시대상과 독자의 목소리를 반영해 여성 작가, 탈서구, 다양한 장르에 초점을 맞춰 시리즈를 구성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장편소설 『등대로』를 시작으로 매달 1권씩 발간될 예정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자 모더니즘 작가이다. 20세기는 세계대전으로 인한 혼란과 과학의 발전, 프로이트 등의 영향으로 인간의 의식과 내면세계에 대해 관심이 드높던 시대였다. 문학계에서도 서사 중심의 전통적 소설 기법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심리를 포착하기 위한 실험적 시도가 이어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저술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유려한 문장과 시적인 묘사로 독보적인 개성을 드러낸다. 에세 시리즈에서는 소설가 정영문의 섬세한 번역으로 원문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렸다.


“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씨가 좋으면.” 램지 부인이 말했다. (...) 이 말은 아들에게 마치 그 탐험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로 결정이 난 것처럼 놀라운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룻밤 어둠을 보내고 하룻낮 항해만 하면 몇 년간 그가 고대했던 경이로움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 “하지만” 하고 아버지가 응접실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날씨는 좋지 않을 거야.” (9-10쪽)


『등대로』는 총 3부로 나뉜다. 램지 부부는 어느 여름날 아이들과 머무는 별장으로 지인들을 초대한다. 1부 ‘창문’에서는 별장의 일상이 평화롭게 묘사된다. 어른들은 정치와 철학을 토론하고 젊은이들은 들판과 바다를 산책한다. 램지 부인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뜨개질을 하는 한편, 남편과 손님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커다란 사건도 극적인 갈등도 없는 조용한 일상이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시점과 주제를 물 흐르듯 유연하게 바꾸어가며 이어진다. 2부 ‘시간은 흐른다’에서는 1부 이후 약 1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 비교적 짧은 분량에 걸쳐 빠르게 서술된다. 1부에서 조밀하고 섬세한 묘사 속에 살아 숨 쉬었던 인물들은 간결한 한 문장으로 숨을 거둔다. 전쟁과 죽음에 묻혀 사람이 찾지 않게 된 별장은 점점 황량해진다. 3부 ‘등대’에서는 살아남은 인물들이 다시 별장에 모이게 된다. 이들은 별장의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 위로 죽은 램지 부인의 그림자를 덧그린다. 램지 부인의 말과 행동은 그가 죽은 뒤에도 등대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며,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만의 빛을 마음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온 적이 없었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온 적이 없을 것이다. 대신 일상의 작은 기적들과 조명들, 어둠 속에서 예기치 않게 켜진 성냥불들이 있었다. (...) 삶이 여기 꼼짝 않고 멈춰 서 있다고, 램지 부인은 말했다. “램지 부인! 램지 부인!” 그녀는 되풀이 말했다. 그녀에게 이 계시는 램지 부인 덕분이었다. (275-276쪽)


『등대로』는 등대에 가고 싶어하는 어린 제임스에게 갈 수 있을 것이라 답하는 램지 부인의 말과, 내일 날씨가 좋지 않을 것이니 갈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램지의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장성한 제임스가 누이 캠과 아버지 램지와 함께 등대에 가 닿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난다. 등대로 시작해 등대로 끝나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등대’의 존재나 정체가 아니다. 인물들은 등대에 가 닿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등대는 깜깜한 바다를 비춘다. 등대의 불빛이 아무리 밝아도 등대가 밝힐 수 있는 건 바다의 극히 일부뿐이다. 아무리 걸출한 작가의 작품도,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기 위한 의식의 흐름 기법도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림자 한 점 없이 환히 비출 수는 없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순간(329쪽)”이 있으며 “생각을 부수고 분할하는 사소한 말들은 사실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304쪽)”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을, 의식을 명징하게 포착할 수 없다고 해서 이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거나 허황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해답이었는지도 몰랐다. ‘당신’ 그리고 ‘나’ 그리고 ‘그녀’는 지나가고 사라지고, 아무것도 머물지 않으며, 모든 것이 변하지만,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306쪽)


고명한 학자인 램지는 그가 결코 인간의 의식 끝에 닿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데도 걸릴 수 없을 그림을 그리는 릴리는 그녀의 불완전한 그림마저도 영원히 남게 되리라 깨닫는다. 그러니 의식의 흐름 기법이,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애초에 명료함이 아니다. 『등대로』는 스스로 등대가 되어 정답을 가리키기보다는 ‘등대로(To the Lighthouse)’ 가는 길을 그려낸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사람의 일생은 밤바다처럼 깜깜해 그 속을 밝혀내는 일은 요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등대로』 속 인물들과 버지니아 울프는 결과물이 완벽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그림이 시도한 것” 자체는 “영원히 남는 것(306쪽)”이라 다짐하며, 인간의 의식을 밝히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등대로』는 등대를 향한 여정이 아니라, 등대를 닮고자 하는 인물들의 마음가짐을 다룬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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