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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23. 2022

‘사랑 없는 세계’가 정말 있을까?

'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은행나무(2020)


일본 나오키상·서점대상 수상 작가 미우라 시온 장편소설

‘사랑 없는’ 식물을 매개로 피어나는 선명한 사랑의 이야기


미우라 시온은 일본 최초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이다. 2012년, 사전 편찬 작업을 정밀하게 묘사한 소설 <배를 엮다>로 서점대상을 수상한 작가는 저자는 식물학 연구실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사랑 없는 세계>로 그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사랑 없는 세계>는 2019년 일본 서점대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탄탄한 작품성과 대중성을 입증하는 한편, “식물 연구 활동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통해 일반 사회에 식물학을 잘 알렸다”는 평과 함께 일본식물학회에서 특별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후지마루’는 T대학 앞에 위치한 양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일한다. 어느 날 식물학을 연구하는 T대학의 ‘마쓰다 연구실’로 배달을 간 후지마루는 연구원 ‘모토무라’에게 반하고 만다. 식물에 관심도 지식도 없던 후지마루는 연구실 사람들과 대화하며 식물에 대해 하나둘씩 배워가고, 모토무라의 도움으로 식물의 세포를 들여다보고 재배실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름 모를 들풀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모토무라의 모습을 보고 후지마루는 벅찬 마음에 봉숭아씨처럼 톡 고백을 터뜨린다. 그러나 모토무라는 후지마루의 고백을 거절한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96쪽)”


식물의 ‘사랑 없는 세계’를 연구하기 위해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모토무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후지마루는 모토무라를 향한 마음을, 식물을 향한 호기심을 쉬이 접을 수 없다. 후지마루는 주문받은 음식을 마쓰다 연구실에 배달하며 연구원들과 친분을 쌓아가고, 모토무라의 연구 과정을 함께 지켜보게 된다. 후지마루는 과연 모토무라를 식물들의 ‘사랑 없는’ 세계에서 둘만의 사랑의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 가능할까?


후지마루와 모토무라는 ‘애기장대’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가까워진다. 후지마루는 식당 오픈 준비를 하며 채소를 썰다가 양배추와 무의 단면이 아름다워 감탄하는 사람이고, 모토무라는 잎사귀의 기공氣孔이 예뻐 티셔츠로 만들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아주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소중히 할 줄 아는 두 사람이 서로의 섬세함과 열정에 감탄하며 가까워지는 것은, 그리고 모토무라가 보여준 현미경 속 세포에서 은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후지마루가 모토무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주 당연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힘은 이 사랑의 필연성도 어려움도 아니라, 각자의 섬세한 존중이 포근하게 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나타난다. 후지마루는 모토무라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의 거절 또한 존중하여 무리하게 제 마음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모토무라는 잘못 교배한 풀 한포기일지라도 하나의 생명이라 여겨 함부로 폐기하지 않고 소중히 키워나간다. 떡잎 하나, 은행잎 하나, 선인장의 가시 하나에, 고구마 하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기뻐하는, “식물을 매개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내뿜는 아스라한 빛”은 “지구 위를 푸르게 덮(385쪽)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을 촉촉하고 부드러운 흙으로 일구어낸다.


“그 열정을, 알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요? 식물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모토무라 씨도,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대상인 식물도, 모두 같아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살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457쪽)”


식물의 사랑 없는 세계에 살겠다는 모토무라의 단호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매개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이 소설에는 사랑이 넘쳐흐른다. 무언가를 일생을 바쳐 탐구하고, 그런 상대방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작디작은 세포에서 은하를 발견하고 속절없이 매혹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이 넘실거린다. 단호하고 도발적인 제목 <사랑 없는 세계>는 그리하여 반어법이나 다름없다. 주인공들이 절절하게 가슴 아프거나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게 사랑하지 않아도 식물처럼 소리 없고 소박하게, 그러나 끝없이 “분열하고 증식하”며 “긴긴 시간을 달려 나아가(96쪽)”는 사랑의 힘이, ‘사랑 없는 세계’에 사랑의 마음을 싹 틔우는 작은 씨앗이 이 책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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