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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19. 2022

연대하지 않는 여성들,
욕망의 각개전투

'성소년', 이희주

<성소년>, 이희주, 문학동네(2021).

이희주는 이야기 속 틈새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작가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어떠한 이야기에도 담기지 못한 채 소외되는 사람도 있다. 작가는 이 틈새를 예민하게 감각하며 호명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낸다. 저급한 문화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미숙한 존재라 치부되던 ‘아이돌 팬덤’의 감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환상통>으로 주목받은 작가는 이번에는 창작물 속에서 자주 지워지는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성소년> 속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이다. 이희주의 여성들은 욕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며 서로를 배신한다.


안나와 나미, 미희와 희애는 가수 ‘요셉’을 납치하기 위해 모인다. 네 여성들은 기억을 잃은 요셉에게 폭우가 내려 다리가 끊어졌다며 거짓말을 하고, 그의 멀쩡한 팔다리가 부러졌다며 부목을 대어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옴짝달싹 못하는 요셉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맨몸을 수건으로 닦아준다. 진통제라고 속여 수면제를 먹이는 한편 요셉의 대소변을 받아주기까지 한다. 미희는 다섯 명이 머물고 있는 산장을 “감옥이 아니라 작게 만든 천국(298쪽)”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는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요셉의 몸에서는 오물이 흐르고 음식물은 끈적하게 주위를 오염시키며, 천사 대신 흉흉한 박제들이 요셉을 둘러싸 감시한다.


요셉을 사랑해마지않는 네 명의 여성들에게 대단히 따스하고 거룩한 연대는 없다. 이들은 수시로 서로를 조롱하고 깔보며, 속이고 배신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인물의 과거와 허물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계기가 아니라 상대를 비웃고 이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네 여성들에게, 그리고 작중 등장인물들에게 사랑은 위로와 회복, 화합과 초월의 매개가 아니다. 사랑은 강렬한 욕망과 소유욕, 그리고 “지옥의 문에 새겨진, 뱀처럼 몸이 엉킨 연인의 부조(222쪽)”처럼 고통의 표상이다. 요셉을 향한 이 집착적인 사랑은 당사자에게 거부되고 왜곡된다. 범죄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에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나미의 자백(329쪽)”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여성들의 욕망은 현실에서도 작중에서도 좀처럼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비단 <성소년>에 묘사된 욕망이 파괴적이며 뒤틀려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평론가 오은교는 근래 한국문학장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적한다. 여성의 성애는 여성의 유토피아적 세계나 무해한 연애담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서사와 여성 연대를 묘사할 때 여성의 성애가 설 자리는 미묘해진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동성 간 관계와 에이섹슈얼의 자리를 고려하더라도 상당 부분 남성의 존재와 맞닿아있을 수밖에 없다. 욕망의 대상이 실재하는 남성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남성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정숙한 여성으로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침묵해야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제는 의도적으로 지워지거나, 욕망의 대상을 이상화하고 미화해야만 재현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희주는 여성의 욕망과 성애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재현하면서도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작가는 가장 날것의 욕망을 퍼 올린다. <성소년> 속 육체는 끊임없이 오염되는 불결한 것이다. ‘이슬만 먹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이상화된 육체나 아름다운 쾌락, 기쁨과 로맨틱한 사랑은 이곳에 없다. 여성들이 욕망하는 대상인 요셉도 순결하고 순정적인 남성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수시로 등장하는 ‘끈적’, ‘부패’, ‘오물’, ‘내장’ 등의 단어 속에서 미희는 급기야 오물로 인한 가려움을 호소한다. 나미는 미희에게 오물을 사랑할 자신도 없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냐며 반문한다.


<성소년> 속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며 연대하려는 몸짓 같은 것은 없다. <성소년>은 치열하고 치밀하고 파괴적인 욕망의 각개전투의 장이다. 오은교의 추천사를 빌리자면 “각자의 뒤틀린 논리로 착실하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망상의 천국”이다. 이희주는 한 남자를 욕망해서 모인, 연대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과감하고 영리하게 풀어낸다. <성소년>은 기존 여성서사와 다소 궤를 달리하지만 이 또한 틀림없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나 관계의 모습을 엿보기도 하고 현실에서 성취하기 어려운 욕망을 대리만족하기도 한다. <성소년>의 쾌감은 폭주하는 욕망의 파격적인 역동성을 체험하는 데에서 온다.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되고 손가락질 당하는 여성의 현실을 가감 없이 직시하는 동시에, 이 여성들이 범죄도 불사하며 자신의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성소년>에는 분명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보도되는 오늘날”에도 “결코 양도하고 싶지 않은 불온한 쾌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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