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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03. 2022

미루미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미뤘나?

'미루리 미루리라', 곽민지와 이진송

<미루리 미루리라>, 곽민지와 이진송, 아말페(2021), 텀블벅 펀딩.


곧잘 미루는 사람들, 작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루미”, “호모 미루미스”들을 위한 변명은 숱하게 있어왔다. 나는 미루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 예열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뿐이다, 하기 싫어 몸부림치며 미루는 시간까지도 일을 하는 시간에 포함된다, 나는 지금 노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머릿속에 다 있으니 정말로 하기만 하면 된다 일단 시작만 하면 정말로 얼마 안 걸린다……. 이 변명들을 막힘없이 줄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호모 미루미스”의 일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미루미”들은 유머러스한, 때로는 자조적인 변명으로 감춰둔 이 끝없는 미루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은근하게 직감하고 있다. 할 일을 미루다가 내 하루도 미루어지고, 내 삶이 미루어지고, 주위사람과의 관계가, 지금의 사랑이 조금씩 미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때로는 그것들이 미루어지는 바람에 해야 할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미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미루는 사람이야’라는 자각은 할 일을 미룰 때마다 찾아온다. 매일 찾아온다는 뜻이다. 먼지처럼 가볍게 쌓인 자기비하와 비관은 뒤돌아보면 어느새 어깨 위에 더께가 되어 쌓여있다. <미루리 미루리라>는 이 두터운 더께를 산뜻하고 시원하게 털어낸다. 저자들은 ‘사람은 누구나 미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랬으니 어쩔 수 없어’하고 넉살좋게 웃으면서도 자만이나 허세로 나아가지 않는다. “미룰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새벽을 불태워 책임감 있게 업보를 청산하며, 미루기라는 부정적인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간다. 세상에는 미루어서는 안 될 것들도 있지만 가끔은 적극적으로 미루어야 하는 순간들도 있다고, 미루기는 나쁜 관계 속에서 나를 보호하는 일이 되기도, 나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문장을 읽는 동안 오랫동안 내 마음 속 원수였던 ‘미루는 나’는 조금 봐줄만 한 존재로 거듭난다.


마음 졸이며 미루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마라톤을 시작 혹은 재개하세요.
가라, 미루미!

<미루리 미루리라>는 미루기를 잠시 중단하고 할 일을 하러 가자는 재치 있는 응원으로 끝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발등이 튀겨질 때까지 미루는 게 우리 “미루미”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는 게 또 “미루미”의 가오니까. 부담스럽지 않게 어깨를 떠미는 응원이 있어서 미루는 일 없이 <미루리 미루리라>의 감상을 빠르게 정리해봤다. 물론 이것도 정말 해야 하는 일을 미루고 미루는 일의 일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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