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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02. 2022

여성들의 판타지,
여성의 고유한 역사로 거듭나다

'원본 없는 판타지', 오혜진 외 14인

<원본 없는 판타지>, 오혜진 외, 후마니타스, 2020.

판타지는 현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판타지는 현실의 표상을 덧입어 현재한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실에서 파생되는 판타지와 판타지를 대변하는 표상 또한 그에 호응하여 계속 변화한다. 그렇기에 판타지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표상을 분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중의 환상으로 빚어져 새로운 환상을 생산해내는 대중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현실이 대중문화 속 환상을 만들어냈는지, 그 환상이 어떠한 표상으로 매체 속에 재현되었으며 그 표상은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대중문화 향유자로서 서로 감상을 나누어보는 것도, 원작자와 제작자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해당 분야를 꾸준히 탐구해온 연구자의 깊이 있는 고찰에 귀 기울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산자의 의도와 향유자의 감상, 연구자의 분석과 비평은 대중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층위로 작용하며 서로의 또 다른 환상과 현실로, 표상으로 존재한다.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일에는 실시간성과 불확실성, 예측불허성, 비역사성 등의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러나 리스크를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대신 꾸준히 연구를 계속하는 이들이 있기에 오늘날 대중문화의 맥락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원본 없는 판타지』는 문학과 방송, 공연, 예술, 영화, 드라마, 게임, SNS 등 다양한 한국 현대문화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여성들이나 보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대중문화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고, 기존의 남성주의적 문화에서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폄하되었던 여성들의 문화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 그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책은 시대에 따라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근대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박차민정은 ‘여성의 사랑’보다도 “비생산적 위험 인구”로 먼저 포착되었던 근대 여성들의 동성연애를, 이화진은 일제 강점기 일본 여성과 조선 여성의 몸을 빌려 이루어졌던 크로스드레싱을 분석한다. 정은영은 한국전쟁 전후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 부흥했다 소멸한 여성국극을, 김대현은 냉전시대 유흥업과 성매매 산업 현장을 배경으로 노래하던 여성 가수들을 다룬다. 2부에서는 1980-90년대의 민주화·자유화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잔존하던 사회적 편견과 압력을 고발한다. 한채윤은 ‘이선희 신드롬’을 빌려 대중문화가 호명하는 ‘소녀’의 압력을, 오혜진은 여성잡지와 박완서의 글을 통해 여성독서사를 살펴본다. 허윤은 가볍고 허구적이라 폄훼되던 순정만화의 의의와 여성독자들의 욕망을 밝혀낸다. 3부에서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발생한 새로운 흐름을 짚어본다. 이승희는 ‘막장’ 드라마를 ‘한국적 신파’와 대조하며 막장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손희정은 브로맨스라는 단어와 함께 난립하는 역사영화들 속 여성주의의 부재를 꼬집는다. 안소현은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던 경험에 비추어 미러링의 의의를 고찰하고, 김효진은 BL문화를 중심으로 여성서사를 둘러싼 여성 소비자들의 치열한 담론을 담아낸다. 4부에서는 SNS와 게임 등 새로이 부상한 플랫폼 속의 포스트페미니즘을 다룬다. 김애라는 SNS 속 10대 여성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치적 행보에 주목하고, 심혜경은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예능인 이영자를 중심으로 예능판의 변동과 여성주의적 미래를 제시한다. 조혜영은 게임 속 여성캐릭터와 여성서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스토리텔링에 주목하고자 한다.


판타지에 원본이 없다는 제목은 여성들의 판타지가 기존 남성주의 콘텐츠의 또 다른 판본이 아님을, 복제나 아류가 아님을 천명한다. ‘남성의 판타지’로만 존재하던 여성들은 이제 판타지를 욕망하고 향유하며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하나의 주체로 거듭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다루는 것들이 하나의 ‘역사’가 되기에는 다소 불완전하고 미흡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족함과 임의성까지도 포함하여 하나의 역사로 발돋움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상당수의 여성주의적 연구는 주류의 역사 속에 편입되지 못한, 여성들의 지워진 역사를 발굴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원본 없는 판타지』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한국 근현대사를 톺아보며 여성사를 새로이 발견하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여성서사가 필요할지 미래를 내다보며 폭넓은 비평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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