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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요편지

삶은, 틈새를 찾기까지는 거대한 벽이다

틈새 시장

by 이충호

단북우체국은 인구 2천 명이 채 안 되는 경북 의성군 단북면의 유일한 우체국이지만 농촌 인구와 이용자 감소 인해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난 5월 직원 단 두 명의 시골 우체국은 그들만의 자구책을 시험해보기로 했는데 이 역발상이 해외교포들 사이에 인기를 끌면서 명성을 얻었다. 수수료를 받지 않는 해외배송대행 서비스였다. 외국에 살고 있는 교민이 한국 물건을 주문해 받으려면, 중간에서 그 물건을 받아 재포장한 뒤 다시 해외로 보내주는 배송대행업체가 필요하다. 우체국은 위치와 관계없이 해외배송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보게된 단북우체국이 발견한 틈새시장이었다. 교포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자 시골 우체국의 ‘다 보낸다 뱅기로’ 서비스에 전 세계에서 주문한 택배가 하루 수십 건씩 몰려들었고 한 달 20만 원 안팎이던 해외 택배 매출은 지난 9월에는 1천만 원으로 50배나 뛰어올랐다. 단북우체국이 일으킨 신바람은 ‘경북지역 활력 재생사업 1호’ 선정으로 이어졌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경영자와 시도하는 일마다 어그러지는 인생 모두가 불법과 탈법, 죽음을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단단한 벽에 난 틈 사이로 들어온 희미한 햇살을 따라가 눈물을 말리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건네는 이도 많다.

삶이라는 게 그렇다. 틈새를 찾기까지는 그저 거대한 벽이다. 철옹성 같은 벽의 틈 사이로 들어와 응달진 곳에 떨어진 희미한 햇빛 한 줄기를 알아볼 만큼의 여유가 없으면 벽 저 너머의 세상은 없는 것이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틈새를 찾아내고 들여다본 거대한 벽 저 너머는 아롱아롱 춤추는 오로라의 세상이다. 죽은 듯 잠들었던 심장은 황홀경에 놀라 깨어나 ‘가자!’ 외치며 둥둥 북소리를 낸다.

개인적으로 처음 책 원고를 썼을 때가 그랬다.

3년 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을 때였다. 보통 책을 읽고 나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잊히게 마련인데, 10권짜리 ‘서양 무협지’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그 책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채 마음을 흔들었다. 2천 년 전 역사 속에 묻혀있는 삶의 지혜들이 안타까웠다. 당연히 우리의 현실과 비교한 책을 누군가는 썼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없었다. 순간, 틈이 보였고 그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세상에 없는 책이니 쓸 수도 있겠다 싶은 희망과 용기가 거대한 벽 사이의 틈으로 들어와 내 발밑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2개월 간 원고지 1천500장(450쪽 분량)을 써 내려갔다.

첫 책이 나오고 나서 얼마 후 큰딸이 “아빠가 알고 있는 인문학적 아포리즘과 영어를 결합하면 20대들이 좋아할 텐데….”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내 머릿속엔 ‘인문 영어’ 책의 얼개가 그려졌다. 원고 쓰기를 마치고 마주한 자리에서 출판사 측은 아직 내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까지 포함해 3권의 ‘인문 영어 시리즈’ 계약을 제안했다. 한 시간 남짓 오간 한담 속에서 그들이 내게서 본 틈과 햇살이었다.

많은 이가 걸어간 길에는 희망과 절망이 살고, 아무도 가지 않은 덤불을 헤치려면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삶이 그렇고 세상이 그렇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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