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위의 자동차 대국이자, 자국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극도로 높아 ‘외산차의 무덤’이라 불리는 시장. 특히 한국 자동차에게는 더욱 냉정하고 폐쇄적이었던 곳, 바로 일본이다. 현대자동차는 2001년 야심 차게 일본 승용차 시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뼈아픈 실패를 맛보고 2009년 말 철수를 결정한 바 있다. ‘현대차의 무덤’이라는 뼈아픈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그랬던 현대차가 2022년, 12년 만에 일본 시장에 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주변의 우려와 냉소 속에서 시작된 재도전은 2년이 지난 지금,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 드라마를 써 내려가고 있다. 미미하지만 의미 있는 판매량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특히 올해 출시된 한 ‘전략 모델’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며 현지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현대차의 변화는 구체적인 숫자로 증명된다. 현대모빌리티재팬(HMJ)에 따르면, 2025년 들어 8월까지 현대차의 일본 내 누적 판매량은 총 648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2024년) 연간 총판매량이었던 618대를 8개월 만에 가뿐히 뛰어넘은 수치다. 절대적인 판매 대수는 여전히 적지만, 가장 폐쇄적인 시장에서 판매량이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신호다.
이러한 극적인 성장의 중심에는 단연 올해 4월 현지에 출시된 경형 전기 SUV ‘캐스퍼 일렉트릭’(현지명 인스터, INSTER)이 있다. 캐스퍼 EV는 일본의 복잡한 도로 환경과 좁은 주차 공간에 최적화된 작은 차체,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을 무기로 출시 직후부터 현지 소비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일본의 자동차 유튜버들은 “이 작은 차체에 이 정도 주행거리(49kWh 모델 기준 약 370km)는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경차답지 않은 공간 활용성과 디자인”이라며 이례적인 호평을 쏟아냈다. 캐스퍼 EV의 성공은 단순한 신차 효과를 넘어, 현대차의 전체 라인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일본 소비자들에게 ‘현대차 = 아이오닉 5 같은 크고 비싼 전기차’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작고 실용적인 캐스퍼 EV가 그 인식을 깨고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지금의 성공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반성 없이는 불가능했다. 2022년 재진출 당시, 현대차는 과거와 180도 다른 파격적인 전략을 들고나왔다. 바로 ‘ZEV(Zero Emission Vehicle, 무공해차) 전용’과 ‘100% 온라인 판매’라는 두 가지 핵심 전략이다.
우선, 내연기관차를 완전히 배제하고 아이오닉 5, 수소전기차 넥쏘, 그리고 캐스퍼 EV 등 친환경 라인업으로만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어설프게 도전하는 대신, 전기차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스마트하고 클린한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주효했다. 판매량이 적더라도, 브랜드의 지향점을 명확히 하여 장기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 올린 것이다.
‘100% 온라인 판매’ 전략 역시 혁신적이었다.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이 드는 오프라인 딜러망을 구축하는 대신, 모든 계약과 결제를 온라인으로 진행해 비용을 절감하고 소비자에게 투명한 가격 정보를 제공했다. 물론 온라인 판매만으로는 고객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대차는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 등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 고객이 직접 차량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고객경험공간(CXC)’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화상 상담 서비스까지 도입하며, 온라인의 편리함과 오프라인의 신뢰감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현지 고객들과의 접점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물론 연간 판매량 1천 대에 못 미치는 현대차의 현재 성적표는 일본 전체 수입차 시장에서 보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작은 숫자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폐쇄적인 시장에서, 가장 아픈 실패를 겪었던 브랜드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금 성공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일본 재도전은 단순히 자동차를 파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철학과 진정성을 파는 과정이다.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현지 시장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전략과 제품으로 꾸준히 문을 두드린 결과, 단단히 닫혀 있던 일본 소비자들의 마음이 아주 조금씩 열리고 있다. 이 의미 있는 반전이 ‘현대차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지우고, ‘가장 혁신적인 모빌리티 브랜드’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얻게 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