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걸 믿어야 해?"…나라마다 다른 전기차 주행거리

by 뉴오토포스트

전기차 '고무줄 주행거리'의 비밀
국가마다 차이나는 측정 방식
어떤 게 진짜 내 차의 스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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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SEAT CUPRA S.A.U

전기차 구매를 고려할 때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숫자는 단연 ‘1회 충전 주행거리’다. 그런데 똑같은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688km를 달린다고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468km밖에 못 간다고 발표한다. 무려 220km에 달하는 이 엄청난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차량의 결함이 아닌, 국가별로 전기차 주행거리를 측정하는 ‘룰’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무줄 주행거리’ 현상이다.

유럽(WLTP), 미국(EPA), 중국(CLTC), 그리고 대한민국(환경부). 각기 다른 기준과 잣대로 전기차의 능력을 평가하는 이 복잡한 ‘인증의 세계’는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다. 대체 어떤 숫자를 믿어야 내 차의 진짜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인지, 나라마다 다른 전기차 주행거리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쳐 본다.

4인 4색, 각기 다른 주행거리 측정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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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테슬라

전기차 공인 주행거리는 각국 정부가 지정한 기관에서, 정해진 규칙(주행 사이클)에 따라 실험실의 테스트 장비(다이나모미터) 위에서 측정된다. 이때 각 나라의 도로 환경과 운전 습관을 반영하기 때문에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은 크게 4가지다.

먼저 유럽 WLTP (Worldwide Harmonized Light Vehicle Test Procedure)가 있다. ‘세계 표준’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도심(저속), 교외(중속), 국도(고속), 고속도로(초고속) 등 다양한 주행 환경을 시뮬레이션하여 측정한다. 비교적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반영하지만, 에어컨이나 히터 사용 등 추가적인 변수를 고려하지 않아 실제 주행거리보다는 다소 길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다음으로 미국 EPA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가 있는데, ‘가장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도심과 고속도로 주행 테스트를 진행한 후, 여기서 나온 측정값 전체에 보정 계수인 ‘0.7’을 곱하여 최종 주행거리를 산출한다. 이는 에어컨 사용, 급가속, 저온 환경 등 실제 주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변수를 반영하기 위한 조치로, WLTP보다 보수적인 결과가 나온다.

중국 CLTC (China Light-duty vehicle Test Cycle)의 경우 ‘가장 관대한’ 방식으로, 흔히 ‘뻥 주행거리’라는 인식이 있다. 평균 속도가 낮고 정체가 심한 중국의 도심 주행 환경에 초점을 맞춰, 가속과 감속을 반복하는 시나리오로 측정된다. 전기차는 저속 주행과 회생제동 시 효율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 방식보다 주행거리가 매우 길게 나온다.

마지막으로 한국 환경부 인증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악명이 높다.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EPA 방식을 따르면서도, 여기에 급가속, 급감속, 에어컨 가동, 혹한기 저온 주행 등 훨씬 더 가혹한 조건들을 추가한 ‘5-사이클’ 보정식을 적용한다. 이 때문에 전 세계에서 주행거리가 가장 짧고 짜게 측정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테슬라 모델 Y로 본 ‘고무줄 주행거리’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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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테슬라

이러한 차이는 실제 차량의 주행거리에 어떻게 반영될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전기차 중 하나인 테슬라 모델 Y 롱레인지를 예로 들어보자. 이 차량의 공인 주행거리는 각국의 기준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극적인 차이를 보인다.

중국 CLTC 기준으로 측정했을 때는 약 688km, 유럽 WLTP 기준은 약 533km, 미국 EPA는 약 496km, 한국 환경부는 약 468km로 측정된다. 가장 관대한 중국과 가장 가혹한 한국의 주행거리 차이는 무려 220km에 달한다. 이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수 있는 엄청난 거리다. 이러한 현상은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을 넘어, 시장의 왜곡을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대 아이오닉 5와 같은 국산 전기차는 가장 가혹한 한국 기준으로 인증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WLTP 기준을 사용하는 유럽에 수출될 때 ‘주행거리가 짧은 차’로 과소평가받을 수 있다. 반대로, WLTP 기준으로 높은 주행거리를 홍보하며 국내에 수입된 전기차는, 막상 한국 환경부 인증을 거치면서 주행거리가 ‘뚝’ 떨어져 소비자들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한다.

공인 연비는 ‘참고’일 뿐, ‘진짜 연비’는 운전 습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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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현대차

결론적으로, 전기차의 공인 주행거리는 각 나라의 상이한 측정 기준에 따른 ‘상대적인 참고 수치’일 뿐, 절대적인 성능 지표가 될 수는 없다. 어떤 기준이 가장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도심 저속 주행이 잦은 운전자에게는 CLTC나 WLTP의 도심 주행거리가, 고속도로 장거리 운행이 많은 운전자에게는 EPA나 환경부의 고속도로 주행거리가 실제 경험과 더 유사할 수 있다.

결국 ‘진짜 주행거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운전자의 발끝에 달려있다. 급가속·급감속을 피하고,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회생제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운전 습관이야말로, 그 어떤 공인 인증 기준보다 내 차의 주행거리를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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