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전기차의 저가 공세로부터 유럽 자동차 산업을 지켜야 한다." 최근 유럽연합(EU)이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관세 장벽을 높이며 부르짖는 구호다. 겉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아주 기묘하고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푸조, 지프, 피아트 등을 거느린 유럽 2위 자동차 그룹 ‘스텔란티스’가, 오히려 중국 전기차 브랜드를 ‘비밀병기’로 내세워 유럽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스텔란티스가 선택한 파트너는 바로 중국의 신흥 강자 ‘리프모터’. 그리고 최근 광저우 모터쇼에서 공개된 리프모터의 신형 전기 SUV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과 스펙으로 유럽 시장을 뒤흔들 준비를 마쳤다.
스텔란티스가 유럽 시장 방어를 위해 낙점한 모델은 리프모터의 신형 소형 전기 SUV ‘A10’이다. 최근 ‘2025 광저우 모터쇼’에서 베일을 벗은 이 차는, 스펙표를 보는 순간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차량은 전장 4,200mm 내외의 소형 SUV로, 유럽의 좁은 도로 환경에 최적화된 크기를 갖췄다. 하지만 그 속은 ‘대형차급’ 기술로 꽉 채워져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가격이다. 중국 현지 시작 가격은 9만 6,800위안, 한화로 약 1,800만 원대에 불과하다. 아무리 중국 내수 가격이라지만, 전기차, 그것도 SUV가 2천만 원도 안 된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수준이다.
가격이 싸다고 해서 흔한 ‘깡통차’를 상상하면 오산이다. A10은 가격 대비 성능비, 즉 ‘가성비’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를 탑재해 1회 충전 시 CLTC 기준 최대 500km의 주행거리를 확보했다. 유럽 WLTP 기준으로 환산해도 300km 후반에서 400km 초반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수치다. 도심형 SUV로서는 차고 넘치는 스펙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첨단 장비다. 1,800만 원짜리 차에 자율주행의 핵심 센서인 ‘루프 라이다’가 탑재된다. 여기에 퀄컴의 최신 스냅드래곤 8295 칩셋을 적용해 스마트폰 수준의 빠릿빠릿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고급 ADAS 기능을 구현했다. 현대차 코나 일렉트릭이나 기아 EV3가 3~4천만 원대인 것을 감안하면, 반값에 더 뛰어난 스펙을 가진 괴물이 등장한 셈이다. 유럽 소비자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스텔란티스는 왜 굳이 중국 브랜드를 유럽에 들여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BYD와 같은 거대 중국 기업들의 유럽 침공을 막기 위한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현재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자국 브랜드(푸조, 피아트 등)로 저렴한 전기차를 만들자니 높은 인건비와 원가 때문에 수익이 나지 않고,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자니 BYD나 MG 같은 중국 브랜드들이 저가 모델로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스텔란티스는 ‘리프모터 인터내셔널’이라는 합작 법인을 설립하고 지분 51%를 확보하는 강수를 뒀다. 즉, 리프모터의 차를 가져와 팔지만, 그 수익의 절반 이상은 스텔란티스가 가져가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는 경쟁 중국 브랜드들의 확장을 막는 ‘방패’이자, 유럽 저가 전기차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창’이다.
스텔란티스는 A10을 비롯한 리프모터의 차량들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핵심 시장에 ‘가성비 전기차’로 포지셔닝하여 출시할 예정이다. 푸조나 지프 같은 기존 브랜드는 프리미엄 영역을 지키게 하고, 리프모터는 저가 시장에서 BYD와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하는, 철저한 ‘이원화 전략’인 셈이다. 자존심은 버렸지만, 실리는 확실하게 챙기겠다는 카를로스 타바레스 CEO의 냉철한 판단이 엿보인다.
스텔란티스와 리프모터의 동행은 급변하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오직 ‘생존’만이 목표일 뿐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자동차 그룹이 중국산 전기차를 ‘비밀병기’로 수입해 판매하는 시대. 이는 중국 전기차 산업의 기술력과 제조 경쟁력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하는 항복 선언이자,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제 유럽 소비자들은 ‘메이드 인 차이나’가 찍힌, 하지만 스텔란티스가 보증하는 1,800만 원대 전기 SUV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 기묘한 ‘적과의 동침’은 유럽 시장을 지키는 신의 한 수가 될까, 아니면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 유럽 자동차 산업의 붕괴를 앞당기게 될까. 전 세계 자동차 업계가 숨죽여 이 도박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