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리드림
30년이 넘는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절을 많이 찾아다녔다. 절에서 만나는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나는 현판에 관심이 더 많다. 현판 글씨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좋아한다. 잘 쓴 글씨를 보면 옷깃을 자연스레 여미기도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 바르게 연필을 잡는 법과 바른 자형으로 글씨 쓰는 것을 꼼꼼하게 가르쳐 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아버님 영향으로 나는 필체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내가 요즘은 매주 붓과 노니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감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서 붓으로 글씨를 쓰고 놀다 보면 온갖 시름을 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나의 스승님은 지난 학기에 우리 학교로 출강을 오신 서예 선생님이시다. 4학년 아이들의 캘리그래피 지도를 해주셨는데 선생님은 한글 서예도 능하지만 그림도 잘 그리시는 분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탁월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선생님과 헤어지기 전에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으로 한 번 놀러 오라고 답해 주셨다.
선생님의 집 거실에는 책상 1개가 있고, 작은 방에 책상 두 개가 맞대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너댓 분이 글씨를 쓰고 계셨는데 짧은 인사를 드리고 다음 기약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글씨를 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인사동에 들러 문방사우를 샀다.
중봉의 길 찾기
서예를 쓰러 가는 날은 설렌다. 4층까지 계단을 오르면서도 콧노래가 나오니 말이다. 옛사람들은 좋은 글씨를 쓰는 서법으로 중봉을 말한다. 중봉이란 획을 그을 때 붓 끝이 그 획의 중앙을 차지하면서 지나가게 긋는 것을 말한다. 나는 중봉으로 가는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기필과 행필, 수필을 배웠다. 기필은 붓을 일으킨다의 의미로 처음 시작할 때의 자세이다. 역입으로 시작해야 한다. 즉, 가는 방향의 거꾸로 갔다가 획을 그어야 한다. 그래야 뾰족하지 않고 둥근 획으로 시작할 수 있다. 행필(붓이 가는 길)에서 한 번에 획을 휙 긋는 것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획을 그으면서 내가 붓의 주인 답게, 내 힘으로 중봉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내게는 크게 다가왔다. 나의 힘 조절을 통해 획을 좀 더 힘차게도, 좀 더 가늘게도 그을 수 있다. 이 점은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동그라미와 별을 그렸다. 붓의 방향을 틀 때 반드시 붓을 세운 뒤 방향을 틀어 간다는 것도 새로웠다. "붓을 세우면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어요. 붓은 둥그니까요." 서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난 붓은 오른쪽과 아래쪽으로만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을 그리면서 붓을 세우기만 하면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내 고정된 관념이 깨지고 붓길을 다시 알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붓을 세워 방향을 바꾸면 중봉을 쉽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새롭게 시작할 때 몸과 마음을 다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붓과 놀기를 하면서 내 삶 또한 중봉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고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붓과 놀다 이제 전서 쓰기를 시작했다.
수업이 몇 주 쌓인 뒤에 판본체 한글을 쓸지 아니면 전서를 쓸지를 정해야 했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서 쓰기를 선택했다. 선생님은 매주 여덟 자 체본을 주신다. 옛사람의 생각이 담긴 옛글자들이다. 오늘날과 같은 글자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많이 달라진 글자가 대부분이다. 선생님의 체본을 따라 쓰면서 나는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상형문자라서 모양을 본떠 만든 글씨가 대부분이라서 일게다.
첫 글자인 물 수는 물이 흐르는 것을 획 다섯 개를 약간씩 다른 각도로 배치하여 표현했다. 첫째 줄 두 번째 글자인 분주할 분은 사람이 바빠서 손을 많이 쓰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이다. 모양을 본떠 문자를 만들어 낸 옛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그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과거의 탐구는 어쩌면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다. 에드워드 헬렛 카(Edward Hallett Carr)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표현한 구절이 생각난다. 옛 것을 탐구하여 현재의 시각과 해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고 이해하면 나의 미래의 모습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옛 사람의 글씨를 통해 미래의 내 글씨의 틀을 세워나가고 싶다. 용비어천가가 전서의 자형을 본받았듯이 나도 내가 쓰는 글씨의 본을 전서에서 찾고 싶다.
결국 서예 쓰기는 나와의 깊이 있는 대화이다.
일주일에 한 번 주어지는 서예 시간, 나는 나와 끊임없는 대화를 한다. '이번에는 좌우 균형이 아쉽네, 이번에는 공간 분할이 좀 안되었네, 이번에는 전체적인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겠군.' 지금은 선생님의 체본과 닮은 글씨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나아가 나만의 글씨를 쓰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활달하면서도 균형에 거스르지 않는 나만의 글씨를 써보고 싶다. 그래서 내 맘대로 되지 않은 세상살이에서 글씨로라도 내가 하고 싶은 내 방식의 글씨를 쓰고 싶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결국 내 안의 어린아이를 만나 창조적인 놀이를 하는 것이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세워 주신 필력의 기초와 2002년도에 졸업한 중어중문학과에서 익힌 한자 공부 경험이 만나고 또 이렇게 서예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건 아마도 필연이 아닐까? 퇴직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기간제 교사로 매일 교단에 서는 일상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서예 시간 만큼은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만난다. 서예 쓰기는 나에게 창조적인 놀이이며 마음껏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아티스트 데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