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미친 액션 러닝 타임 <존 윅4>
<존 윅4>는 내게 충격적이다. 손에 잡히는 뭐든 살인 무기로 쓰는 존 윅(키아누 리브스 분)의 시그니처 액션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막에서부터 사크레쾨르 대성당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는 미친 액션 러닝 타임 때문도 아니다. 남들이 감탄하며 몰입하느라 지나칠 액션 언저리 장면들에 내가 꽂혀서다. 과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존 윅4>의 세계관이 난 심상찮다.
14일 현재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존 윅4>의 창조자는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이다. 그의 철학적·정치적·윤리적·미적·과학적 견해가 액션 서사에 녹아 있다. 블록버스터에 걸맞는 강도 높고 번화한 액션을 먹히게 하는 세계관이 암암리에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계 국면마다 메아리치는 대사가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인 것도 그중 하나다.
예를 들면, 윈스턴(이안 맥쉐인 분)과 샤론(랜스 레드딕 분)이 주고받는 “인생이 이런 거지(죠).”, 코지(사나다 히로유키 분)가 존 윅에게 하는 “어려울 때 돕는 게 진짜 우정이지.”와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거야.”, 케인(견자단 분)의 “옳은 길을 보는 데는 눈이 필요 없어.”, 존 윅과 케인이 주고받는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산다.” 등이다.
저 명언들을 클리셰 삼은 세계관을 간추리면, 첫째 무자비한 규율을 따르는 킬러들이 일상에 묻어 살아간다. 둘째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 회의’가 전 세계의 킬러들을 제압한다, 셋째 콘티넨탈 호텔은 킬러들의 성역이다. 넷째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 분) 같은 악당이 활개 친다. 다섯째 노숙자들의 왕이 방탄 슈트를 건네고 무기 소믈리에처럼 행동한다.
이상이 킬러들과 연관된 주된 설정이라면, 이하는 영상 분위기를 띄우는 보조 설정이다. 즉, 여섯째 패밀리(조직과 개인)와 우정의 가치가 충돌한다. 일곱째 킬러들을 선동하는 록·메탈 음악 방송을 진행한다. 여덟째 킬러들의 난투 현장은 아랑곳없는 클럽의 떼춤과 개선문 주변 차량 행렬이 계속된다. 아홉째 존 윅은 묘비명을 신경 쓰는 종교적 인간이다.
감독이 설정한 세계에서 우선 순위는 인간적 정서가 아니다. 킬러 현장의 떼춤이 암시하듯 일상은 이미 폭력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 킬러가 아닌 일반인들이 킬러들의 세계에 영향받는 부자유한 처지에 놓인 거다. 일반인의 안위마저 조직적 폭력이 틀어쥔 그런 세계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레전드 킬러 존 윅의 몸부림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결국 존 윅은 자유를 얻었지만, ‘최고 회의’는 건재하다. 그라몽 후작류의 악당은 또 나올 것이고, 222 계단에서 고지를 눈앞에 두고 굴러 떨어지는 제2의 존 윅도 등장할 것이다. 폭력에서 자유로운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어렵다는 거다. 흥미진진한 <존 윅4>에 얼을 빼고 있던 내가 저 지경에 이르면 안 된다는 현실적 조바심에 퍼뜩 정신이 든 거다.
<존 윅4>에는 일상적 평화에 헌신하는 공권력이 부재한다. 거리를 떠돌던 고아 존 윅이 끝내 들을 수 없었던 윈스턴의 마지막 대사, “잘 가라, 내 아들아”를 엔딩 장면으로 처리한 설정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지금 여기라도 인간적 향기를 맘껏 호흡할 수 있는 사회적 공기가 아쉽지 않기를 바란다. 추적자에서 조력자로 돌아선 노바디(샤미어 앤더슨 분)가 늘어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