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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Feb 24. 2024

돈에 환장한 막장 인생들, 기시감 있어

[김유경의 책씻이] 대작가의 돈 이야기, <황금종이>(조정래, 해냄)

내 양식거리에 변화가 생겼다. 아침 겸 점심으로 과일과 채소를 듬뿍 먹는데, 소위 금사과, 금귤, 금딸기 식으로 과일값이 많이 올라서다. 지구 온난화, 수분매개곤충인 벌꿀 감소, 한국 특유의 청과물 유통구조 등이 어우러져 그렇다는데,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으니 문제다. 그렇다고 ‘까짓거, 덜 먹거나 안 먹으면 그만이다.’ 하기엔 오래된 식습관이다. 당장 돈이 아쉽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냥 종이가 아니다. “황금종이”다. 조정래의 두 권짜리 장편 소설 <황금종이>를 집어 든 건 과일값에 치여 돈에 혈안이 돼서가 아니다. 꿀꿀한 심사도 달랠 겸 대작가의 돈 이야기가 궁금해서다. 소설 앞 ‘작가의 말’에 불쑥 놓인 “황금종이”를 겨냥한 사상적 물음들이 김빠지게 했지만, 정작 소설은 흥미진진해 과일값 타령에서 곧 벗어났다.  

    

작가는 “운동권 처녀성”을 유지하는 민변 소속 변호사 이태하를 내세워 “돈에 환장한” 막장 인생들을 수임 사건 순으로 전개하는데, 사회기사에서 읽거나 본 듯한 기시감을 안긴다. 한편, 그 스토리라인의 저울추처럼 삽입된, 정치하다 귀농한 한지섭 선배의 삶은, 돈이면 다 되는 세상과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는 세상을 분별시키며, 책읽기 차원을 구체적으로 끌어올린다.   

  

“의원 생활 4년 동안 국민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온갖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괴로움과 고민은 갈수록 커져갔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자꾸 죄짓지 말라는 결론을 내리고 정치를 외면했던 거요.”(145~146쪽)     


월세를 4배로 올리는 건물주의 탐욕, 옛 연인을 차버리고 부유한 새 연인을 만나다 처절한 살인극에 희생된 친구의 딸, 갓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에 실패하자 80대 남성의 간병인으로 상주해 성추행도 감수하는 20대 여성의 계산속, “아침마다 내 오줌을 찍어 먹어보기 때문”에 동거녀와 결혼하려는 75세 아버지에게 손들고 내쫓긴 자녀들 등에게 맞춤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다 죽었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돈만이 오로지 살아 있는 신이다.”(312쪽)   

  

그와 달리 “돈을 지배하는 주인”의 사례도 몇 있다. 말단 여변호사를 재벌 2세가 성추행한 걸 빌미로 거액을 챙긴 대형 로펌 대표에게서 그 돈을 돌려받아 피해자에게 전달하고도 그 성공보수를 극구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 그중 일부를 간암 투병 중인 운동권 선배 부인에게 건넨 것이 대표적이다. 그 과정에 한몫한 근성 있는 기자의 뚝심도 좋은 예다.  

  

돈은 현실적으로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나 “돈에 지배당하는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서 변호사 이태하가 성공보수 10억을 제시한 소송건에 대해 시끄러워진 속내를 의식하는 퇴근길을 묘사한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시시때때로 누구든 고민을 투과해야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듯이.   

    

“이태하는 사무실을 나섰다. 드높은 빌딩들만 치솟아 하늘이 좁아질 대로 좁아진 도심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넓은 거리에는 숨 가쁘게 돌아친 도시의 일과에 지친 사람들이 가득 걸어가고 있었다. 이태하도 복잡한 생각이 뒤엉킨 채 그 사람들 속으로 섞여들었다.”(2권, 282~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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