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영화만평] 참과 거짓의 시비보다 민족적 반감을 안긴 <파묘>
어릴 적 밤에 휘파람을 불면 할머니한테 혼났다. 귀신 나온다고. <파묘>의 도입부에서 무당 화림(김고은 분)은 의뢰인 박지용(김재철 분)의 젖먹이 아들을 향해 휘파람을 분다. 그제서야 그 시절 꾸중의 뿌리를 알았다. 기를 내뿜는 눈초리에다가 감각적이고 패셔너블한 당찬 화림을 앞장세워 장재현 감독은 오컬트 화면을 지핀다. 이 땅에서 미신 운운하며 업신여기고 내쳤던 무당의 존재감 부각이 나쁘지 않다.
“사람들은 빛에 비쳐 보이는 것만 믿지만 사실 어둠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귀신, 악마, 요괴, 도깨비 여러가지로 불리는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고 싶어하지만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반칙을 써서 나오기도 한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찾는다. 음과 양, 과학과 미신 사이에 있는 나를.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양, 귀신은 음이다. 각각 분수에 맞게 제자리를 지키도록 둘 사이에서 교통 정리를 하는 게 무속인의 역할이란 얘기다. 화림은 죽은 조상이 “지랄”을 떠는 묫바람(귀신병)을 다스려야 한다며 이장을 권한다. 풍수사(지관) 김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염쟁이) 고영근(유해진 분)이 등장하는 맥락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명당 풍수의 속살을 꼬집고, 고대 일본의 관직이었던 음양사(陰陽師)와 일제가 한반도에 심어놓았다던 쇠말뚝을 소환한다.
<파묘>에서 일본 귀신 오니를 파묘터에 있게 한 여우(기순애) 음양사는 화림과 상덕의 역할을 두루 행할 수 있는 술수가다. 그 계열이 21세기에도 버젓한 일본의 신사 문화에 비해, 한국의 무속은 신사 참배 강요를 시작으로 1960~70년대 새마을운동의 미신 타파에 휩쓸리며 무당들이 잡혀가거나 신당에 대한 파괴가 행해져 약화됐다. 우리네 상례 문화가 뜬금없는 검은 상복 일색의 장례식장 풍경으로 변화한 것도 일제강점기에서 말미암는다.
“핏줄이다. 같은 DNA로 엮여진 공혈(共血)의 집단. 흙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모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미신이니, 사기니 다 좆까라 그래. 전국 상위 1%들에게 풍수지리는 종교이자 신앙이다. 나는 지관 호안 김상덕이다.”
고증이 탄탄한 감독의 연출은 친절하기까지 하다. 관객의 사전 이해를 위해 줄거리 전환 직전에 구성 안내 문자를 화면에 띄운다. 도입부, 1장: 음양오행(陰陽五行), 2장: 이름 없는 묘(墓), 3장: 혼령(魂靈), 4장: 동티(動土), 5장: 도깨비불(おに), 6장:부 쇠말뚝(鐵針), 에필로그 등 8번이다. 그러나 전개 흐름을 예상할 수 없어 객석에 앉은 나는 문득문득 숨죽이다 놀라다 킥킥 웃는다. 저절로 몰입도가 높아지는 괴괴함, 기괴한 볼거리, 느닷없는 반전 등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중 대살굿과 파묘를 동시에 진행하는 장면에서 펼쳐진 김고은의 연기는 일품이다. 단순한 무당 흉내가 아니라 재현으로 다가올 만큼 현장감이 넘친다. 또한 파묘한 웅덩이에서 오니와 맞서는 최민식의 관록 밴 정중동의 안간힘 열연은 어떤 국제영화제에 내세워도 우뚝할 만하다. 두 호연의 어우러짐은, 오니를 생성한 비가시적 세계를 환기시킨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에 대해, 참과 거짓의 시비보다, 민족적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파묘>를 응시하며 새삼 영화와 세상이 얽혀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나의 육신과 영혼을 둘로 나눌 수 없듯, 내가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럴듯함의 해피 엔딩이 돋보인 에필로그가 반가운 이유다. 웃음 때문에 수술 부위가 터진 상덕의 배를 윙크하듯 비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