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죽음을 마다하다

[김유경의 책씻이] 통념을 깨는 쉼표 릴레이문장

by 김유경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정영문, 워크룸 프레스, 2018)


책 읽을 때마다 못된 버릇이 튀어 나온다. 무슨 책이든 정보부터 캐려 한다. 정보 낚기는 깜냥의 잣대에 토대한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면서도 ‘나’라 우길 걸 챙기는 것이다. 부적절한 감상 태도다. 정영문 소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이하에서는 <강물에>로 표기)는 처음부터 그 악습을 조장한다. 메타소설 특유의 까발림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니 그렇다.


사실 <강물에>는 높은 문해력을 요구한다. 부족하면 재미남을 느끼기 어렵다. 우선 모든 문장이 길다. 실험적인 서사 기법이 문장을 통해 구현되어서다. 기사문의 육하원칙을 떠올리게 하는 첫 문장부터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이 연결어미 일곱 개의 쉼표 세 개로 이어진다. 릴레이경주처럼 쉼표 단위로 바통을 건네받아야 새 의미가 생성된다. 나는 그 맥락짓기를 쉼표 릴레이문장이라 부르기로 한다.


<강물에>는 통념 상 말이 안 되는 말들이 부러 많다. “의식의 흐름 기법과 의식의 마비 기법과 의식의 착란 기법이 뒤섞인 소설”이어서 그렇다. 텍사스라는 지명을 말꼬리 삼는 연상 흐름을 맛보기로 들면 이렇다. 텍사스에서 텍사스를 대표하는 음식인 칠리로, 그 음식에 들어간 콩으로, 콩이 유발한다는 우울증으로,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두부 얘기로, 급기야 존 F. 케네디 암살범 운운으로 이어진다.


문장에 깃든 비약은 갈수록 난해해지는데, “말이 안 되는 어떤 생각이” “말이 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설득력 있게 말이 되”는 걸 보는 재미가 있기는 하다. 의식의 흐름 중에 의식의 마비와 착란이 끼어든다는 얘긴데, 좋게 보면 그건 리얼리스트의 안목을 넓히는 유머리스트의 시선이거나, 어쩌면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행위”처럼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중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문장이 있다. 세계의 방치 콘셉트에 상관하는 집념 같지 않은 집념이 짚여져서다. “무성한 잡초들”과 “캡슐”과 “들소”로 구성된 “그 지긋지긋하고 터무니없는 풍경”이 눈에 거슬려 다시 보고 또 보게 돼 “아무런 쓸모가 없지는 않”다는 맥락이다. 그러니까 그 쉼표 릴레이문장은 “지긋지긋하고 터무니없는 풍경”을 짓는 메커니즘(사회 구조)에 대해 말 거는 셈이다.


내가 <강물에>에서 정말 낚고픈 건 “7인의 사무라이”다. ‘사무라이’ 하면 떠오르는 무사 이미지와 거리 먼 표제 때문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작가의 “머릿속에 출현”해 늘 함께하게 된 허구적 존재로 밝혀지는데, 그걸로 충분치 않다.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이 서로 싸우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에 깃든 뉘앙스가 뭐냐는 거다.


<강물에>가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메타소설로서 흘린 단서들을 통해 해답을 낚을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류의 행위들을 “나의 7인의 사무라이”가 “흥미롭게 바라보는” 데서 묻어나는 호감이 그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글이나 쓰는 사람에게 미래는 지금도 없었고 미래에는 미래가 더 없을 거라는 생각”이 “괜히 도랑이나 구덩이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글”이나마 짓는 쪽으로 향하는 긍정적 변화다.


그 둘을 조합해 의역하면, 거창한 의미는 없더라도 소설쓰기는 계속하겠다는 속내다. 그러할 때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의 한갓진 이미지는 대의명분과 상관없는 ‘소설의 사소화’로 다가온다. 순간순간 충실한 삶에 정처는 따로 없다. 안빈낙도하는 삶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소설의 죽음을 마다한 작가 정영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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