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영사기를 돌리다

[김유경의 책씻이] <기억>,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20.

by 김유경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근작 <기억>을 마주한다. 그의 첫 장편소설 <개미>에 대해 경탄했던 게 새삼 떠오른다. 개미 시선으로 개미의 복잡반응에 눈뜨는 낯선 경험이 강렬했기에. <기억> 또한 처음부터 흥미진진하게 내 시야를 확장시킨다. 전생들로 퇴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 르네의 인생 영사기에 홀린다. 르네의 시야에 내 것을 오버랩하고픈 욕망이 꿈틀댄다.


전생은 윤회를 전제한다. 형상을 달리하면서 생명은 불생불멸하며 상속된다는 얘기다. <기억>은 그 생명 기운을 기억(업)으로 보고 나비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억은 윤회 횟수만큼 쌓인 다생의 퇴적층이자 인과의 산물인 셈이다. 르네는 그 퇴적층에 돌연 접속한 후 일상이 급변한다. 물론 거기에는 현실 사회와 불화하기 쉬운 역사 교사 르네의 신조가 한몫한다.


“「아빠 말을 잘 기억해 두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 거짓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

그때 르네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커서 아빠처럼 역사 교사가 될 거야. 하지만 나는 꼭 진실을 말해 줄 거야. 사람들이 내 얘기를 믿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47쪽)


“몇몇 학생이 마뜩찮은 얼굴로 입을 삐죽 내민다.

「바칼로레아 시험을 볼 때 그렇게 적어요?」

「이건 여러분 평생에 도움이 될 이야깁니다.」

르네가 학생들을 쳐다보며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한다.

「실제 벌어진 역사와 기술된 역사, 피지배자의 역사와 지배자의 역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에서 기억은 사활이 걸린 문제예요. 그래서 수많은 정치인이 기억을 거머쥐고,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주물러 빚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 한 학생이 말꼬리를 문다. 「선생님 얘기를 듣고 교과서에 없는 엉뚱한 얘기를 적으면 바칼로레아에서 떨어질 텐데요.」”(71쪽)


르네의 삶이 별스러운 건 현생과 전생을 접목하려 한 탓이다. 전생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전현수 박사(정신과 전문의, 불교 수행자)는 전생에 개입해 운명을 바꾸려는 <기억>의 문학적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여길 것 같다. 그런 넘침은 기술된 역사적 사실의 진실 여부를 탐문해 바로잡으려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 문제의식이 관통하는 <기억>에 윤리적 가치관이 미미한 게 아쉽다.


<기억>은 공식적 역사가 승자들의 기록이라는 주장을 전생의 사건들을 삽입해 강화한다. 전생과의 그런 극적인 너나들이 언행을 빼쏜 게 연극적 ‘막’ 구성이다. 제1막 히프노스, 제2막 아틀란티스, 제3막 이집트로 나뉘어져 르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과(윤회)에 노출된 삶을 부각하며 전개시킨다. 독자에게 필연적 운명과 자유의지 중에 우위를 정하라고 암시하면서.


최면을 의미하는 히프노스의 제1막은 처음 퇴행최면을 통해 전생의 나(들)을 만난 르네가 현생에서의 소명을 깨닫는 발단으로, 아틀란티스인 게브와 함께 대홍수와 문명 소멸을 체험하고 이집트로 향하는 제2막은 상승부와 정점으로 볼 수 있다. 아틀란티스인들에 대한 고고학적 유물 확보에 실패하고 바다를 떠도는 제3막은 하강부와 종결인 셈이다.


제3막에서 르네는 전생의 나(들)과 상호 빙의해 탈옥을 감행하고, 자기 영혼의 환생들과 공동의 무의식 속에서 회합을 연다. 다양한 업(들)의 소환이다. “전생이 원한 삶의 경로를 따라” 환생하는 <기억>의 업은, 인과의 연쇄 관계에 토대한 불교의 업 사상과 거리가 멀지만, 욕망이 윤회를 부추긴다는 점에서는 같다. <기억>에 의하면, 르네는 과거 업들이 진화한 존재의 최신 버전, 즉 신종 “나비”다.


르네는 자신의 기억 보강을 위해 “므네모스”란 파일을 만들어 기록한다. 항해 중에는 므네모스라는 채널을 만들어 역사의 진실을 대중에게 전하려 시도한다. 물론 므네모스는 어학사전에 나오지 않는 어휘다. 르네는 전생 체험으로 알게 된 기억들과 이후 발생한 사건들과 자기 생각들, 그리고 탐색한 관련 지식들을 그 파일에 저장한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좋고 싫은 일들이 섞인 르네의 기억 상자, 즉 일기장인 셈이다.


채널 므네모스를 개설한 르네는 동료들과 심각하게 논의한다. 다른 채널들도 서로 자기들이 진실하다고 외칠 텐데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에 대해. 내 주변에 산재한 유튜브 채널들과 그 주장들을 떠올리면 타당한 고민이다. <기억>은 르네 무리가 바다 위를 떠돌며 각자 능력껏 사회 참여를 꾀하는 열린 결말이다. 르네의 역사의식을 한갓 웹서핑에 낚이기 위해 애쓰는 낱낱의 주장들(나비들) 중 하나로 마무리한 셈이다.


대개 소설은 모티프에 맞춤한 근거들을 현실에서 포착해 확충한 문학적 상상세계다. <기억>이 소재 삼은 셋, 즉 사라진 기억(전생)과 사라진 문명(아틀란티스)와 고고학적 유적지 이집트는 르네의 총체적 기억 회복을 극적으로 전개하는 데 맞춤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엉성한 허구적 짜임새는 <기억>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한바탕의 해프닝으로 약화시킨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억>에는 이 땅의 “처벌받지 않은 범죄들로 이루어진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질긴 맥락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역사적 사실의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게 역사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견해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한다. 우리네 과거사 바로잡기에 대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꾸 과거를 들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기억>을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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