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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Sep 05. 2016

부모의 다른 육아방식, 못 간다 VS 가지 마

엄마 그 말은 날 울려요


사람의 개성이 각양각색이듯 부모의 모습 또한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로서 생각하는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있다. 우리는 부부이자 동시에 한 아이의 엄마, 아빠로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마주한다. 각자 다른 성장과정 때문이기도 하고 스스로가 선택해서 만든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각자의 과거와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부가 아이의 육아 갈등에 있어서 각자의 태도를 취할 때 일어난다. 두 사람은 대적해야 할 서로가 버겁고 아이는 부모의 다른 말과 모습에 혼란스럽다. 이런 간극을 줄이기 위해 부부는 항상 대화를 해야 하고 아이의 행동과 발달을 공유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잘 돼가는 듯하다가도 늘 벼락같은 '그 한 순간'이 문제다.


우리 부부는 주일이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 신자 수가 매우 적은 개척 교회인 탓(?)에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교회 식구들과 함께 배식받아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는다. 아이는 유일한 유아 성도라서 언제나 사랑과 배려를 받지만 식사만큼은 아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가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꼭 끼니를 때워야만 한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하기도 하고 잘 적응해준 아이지만 가끔 밥을 먹기 싫다거나 말썽거리를 찾아 나서도 한다.


이번이 그런 날이었다. 점심메뉴로 좋아하는 국수가 나왔는데 미처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아이는 2년 전부터 꼬박이 잘 앉아있던 자기 식탁의자에 오늘은 앉고 싶지 않아했다. 놀이터에 가고 싶은 게 그 이유였는데 아침부터 가고 싶었던 놀이터를 지금 당장 가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재미난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퉁치고 싶어 했다.


"밥을 먹어야지. 그럼 놀이터에  못 가지."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너 놀이터 가지 마!" 하는 소리가 쩌렁~ 울렸다. 두세 번 의자에서 빠져나오려던 아이를 예의 주시하던 아빠의 목소리였다. 엄마가 놀이터에 데려다준다고 약속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밥을 먹고 나서 힘을 내서 놀이터에 가서 재밌게 놀자는 말을 이어 가려고 하고 있는데 "가지 마"라는 말 한마디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매끄럽던 조화로움이 깨지는 건 언제나 일순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 순간이 전체를 지배하고 만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우는 아이에게 아빠의 호통은 더해졌고 나는 바로 남편에게 그만하고 저리 가라고 싫은 내색을 했다. 그리곤 내가 못 간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가지 말라고 하는 건지 물었다. 남편은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냐고 했다. 


호흡을 길게 내쉬고 말을 아꼈다. 그리고 속으로 대뇌 었다. '다르다. 엄연히 다르다. 절대적으로 다르다'라고. 아이가 밥을 먹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그리고 나중을 대비하지 않아서 놀이터에 못 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그래서 놀이터에 가기 위해 생각을 바꾸고 밥을 먹고 자신의 행동을 '개선할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과정이지만, "가지 마"라는 외마디는 아이의 의지를 꺾는 것이고 단순히 명령일 뿐이어서 결과는 그저 폭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길고 긴 마음을 순간에 설명할 시간이 없어 "못가는 건 '선택'이고 가지마는 '명령'이지."라고만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를 달래 주었다. 아이는 금세 울음을 멈추고 국수를 먹고 놀이터에 가겠다는 선택을 했다. 울음 끝이 길지 않아 늘 고맙고 짠한 구석이 들게 하는 아이였다. 이미 알고 있던 그 합의를 남편이 저버린 것 같아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부모로서 가장 큰 갈등을 겪는 부분이었다.  


아이는 설명하면 알아듣고 스스로 변화한다. VS 아이는 잘못했을 때 즉시 혼내서 알려주어야 한다.


남편은 유독 사람들 앞에서 아이에게 엄했다. 이상하리만큼 그랬다. 자신이 판단했을 때 잘못이라 여겨지면 저음의 울림통 있는 목소리로 무섭게 아이 이름을 부르고 아이를 낚아채듯 안고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면 저 멀리서 찢어질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이 싫었지만 매번 남편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육아 원칙이 있고 무엇보다 아이 아빠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싫은 점마저도 아빠로서는 노력이고 시행착오일  있는 것이었다. 몇 번 호되게 아이를 혼내고 아이가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이후로 극도로 조심하긴 했지만 가끔은 허무하리만큼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성격이 육아에 직접적으로 닿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평상시 남편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자신의 생각을 나눠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울 때는 대부분 아이에게 다정한 편이다. 귀찮은 마음이 들 법한데도 놀이터에 나가 몸으로 놀아주고 저녁 목욕은 빼놓지 않고 시켜주면서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하고 속상한 아이 마음을 읽어주고 풀어주며 스스로 친구 같은 아빠이길 자청한다.


그런데 나는 톡 쏘는 말투를 장착하고 내 기준에서 배려와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면 매서운 말을 서슴지 않고 날리는 편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내가 듣는 것도 싫어해서 되도록 잔소리를 하지 않고 되도록 잔소리 들을 일도 만들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개인적이고 냉정해서 엄마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인데도 아이에게는 매몰차게 하지 않는다. 가르쳐주고 또 가르쳐준다. 언제는 짧고 쉬운 말로 설명했다가 언제는 고백하듯 엄마의 어려움을 호소했다가 언젠가는 부탁도 해가면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알려주길 쉬지 않는다.  


내 아이라서도 아니고 고슴도치 사랑이어서가 아니다. '아이가 억울할 일을 만들지 말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내 이기심을 앞서는 탓이다. 실수든 후회든 선택을 해보는 것은 아이의 몫이라는 합리와 논리가 육아에도 적용된 탓일 뿐이다. '말 잘 듣는 아이'라는 허울로 아이를 치장해 부모로서의 자랑을 하나 더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이의 템포를 알아채 주고 같은 말이라도 아이가 울지 않을 말들을 골라주고 싶을 뿐이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남편은 내 옆에 와서 슬쩍 웃었다. 내 생각에 동의해 준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살짝 눈을 흘기고 "분명히 달라."라는 말만 남긴 채 나도 웃어 버렸다. 남편의 방식도 통할 때가 있고 필요할 때도 있기에 존중하고 싶지만 그 날이 오늘은 아니었을 뿐이니 길게 끌 필요도 없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이를 놀이터에 데리고 가 온몸이 땀에 흠뻑 젖도록 놀아주었다. 아이를 씻기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육아라는 이름으로 가득 채워진 하루를 되짚어 본다.


다음 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인사하는 두 아이의 엄마분이 아이를 보고 한 말이 귀에 꽂혔다. "이때가 젤 이쁘죠. 협박이 먹힐 때잖아요." 의외의 이유가 나왔다. 4살이 예쁜 정의가 새롭다. 어쩐지 '맞다.'라고 속으로 동의해본다. 지금 아이는 부모가 억지로 끌고 갈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마음을 달래주며 좋은 말로 채워주지 않으면 다섯 살이 되고, 여섯 살이 되면서 우리에게 마음이 돌아서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생각이라는 게 더 확고해지면 아무리 부모 말이 맞더라도 돌아 세우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직은 내 말을 들어주는 때라는 안심과 함께 아이를 대할 태도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말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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