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하게 씻고 나와 거실에서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은 아이가 놀던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엄마 미워." 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뭐가 또 미운 것일까. 궁금한 마음도 잠시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바로 사과부터 할 준비를 한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이유만 확실하다면 엄마는 사과할 마음만은 충분하다. 그리고 이번 이유도 나름 타당해 보인다. 아이가 변신 로봇에 아기 때 끌고 다니던 오리가 매달린 줄의 끝을 걸어 연결해놓았는데, 그 줄이 처음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던 내가 무심코 그 줄을 발로 건드려 그렇게 된 듯했고, 줄의 흐트러짐을 발견한 아이는 엄마가 너무나도 미웠던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울기부터 하는 것', 그러지 말고 똑바르고 예쁘게 말하자, 가 오늘은 안 먹힐 모양이다. 혼내는 것도 사과하는 것도 눈치껏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게 엄마 인생이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들이 그렇게 킹가이즈랑 오리랑 연결해 놨는데 엄마가 발로 툭 건드려서 망쳐놨구나. 엄마가 못 봤어. 봤으면 그렇게 안 했을 거야. 엄마가 다음번엔 조심하고 아들이 해 놓은 거 망치지 않게 조심할게. 알았지?"
"네"
길고도 길게, 성심 성의껏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나면 아이는 금세 기분이 돌아오고 감정이 회복되어 더 이상 울거나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전에 그랬으니 어쩐다 하는 마음도 없다. 그야말로 뒤끝이란 게 없는 것이다. 그저 그 순간의 마음만 읽어주면 평화롭게 해피엔딩이거늘 이 얼마나 남는 장사에 아름다운 결말인가?
그리고 내 마음도 정말 편안하다. 온전히 내 잘못을 인정해 말로 표현하고 나면 뭔가 말끔하게 그 일이 정리되어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는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을 나는 아이가 생기기 전엔 제대로 할 줄 몰랐고, 지금은 오히려 그때의 내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낯설게 느껴진다.
남편과 정말 많이 싸웠다.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우리는 기싸움을 넘어서 이토록 맞지 않으면 헤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사건건 싸워댔다. 사과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땠는지 기준 삼기엔 그 데이터가 꽤나 쓸모가 있을 만큼 우린 수백 번을 싸웠고 나는 연애기간을 지나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단 한 번의 사과도 한 적이 없었다.
마치 애초에 사과라는 단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 같이 굴었다. 사과를 먼저 하지 않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했다. 내가 먼저 시비 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시작하지 않은 싸움을 내가 끝내는 것이 억울했다. 그리고 정말 내 말이 다 맞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사람이 사과하던가는 기본이고, 나중에는 사과의 문제를 넘어서 이런 기분 나쁜 감정을 느끼게 한 상대에게 싸움을 끝내주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지 않다는 못된 생각도 서슴지 않았다. 괴로워라 괴로워라. 나만 괜찮으면 된다.
나는 그렇게 지독하고 매정하게만 굴었었다. 그런데 아이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 큰 성인들은 싸워야 할 이유도 다양하고 알게 모르게 시비에 말려들게도 된다. 내 판단이 명확하다고 해서 꼭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억울해도 때론 요령도 생기지만 아이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처음이자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에 쉽게 갈 수가 없었다.
소리를 쳐서 간단히 제압하고 싶었지만 왜 그런지 물었다.
힘으로 행동을 저지하고 싶었지만 참고 곁에 머물렀다.
계속 울면 어떻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대신 우선 들어주었다.
뭐 그 딴 일로 우냐고 아이만의 기준을 무시하기보단 먼저 사과했다.
감정을 읽어주지 않아 내팽개쳐져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웃어주었다.
무엇보다 아이도 사과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고 싶었다.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사과하면 어지간해선 잘 받아준다. 그냥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엄마의 마음을 알아준다. 사과하는 엄마의 마음이 안쓰러웠는지 애처로웠는지 "네, 다음엔 그러지 마요."라며 반성하면 됐다는 듯 다독여주는 행동도 보여준다.
나는 아이와 상호작용을 통해 사과의 효용성을 알게 되면서 남편에게도 사과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집에서 음식쓰레기 냄새가 난다고 하면 내 살림에 탓을 하는 것 같아 눈을 흘기고, 잘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접어두고 그것만 지적하는 것 같은 생각에 화가 나서는 왜 음식쓰레기가 쌓이게 되었는지, 그건 당신의 몫이었다느니 전에 같으면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혈안이 되었을 모습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 "미안, 먼저 좀 치울 걸."하고 가볍게 사과를 하고 끝낸다. 그러면 더 이상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 본 아이는 당연하게도 사과를 잘하는 편이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 때면 입을 꾹 다물고 자기 생각과 고집이 있다는 다부진 모습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받고 싶어 한다. 가끔 복잡한 갈등 상황도 "미안해"라는 말 한 마디로 끝내려고 할 때가 있어 아직 조금 부족할 뿐이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나은 말이고, '미안해'라는 말을 할 때의 과정과 쓰임은 앞으로 또 가르쳐주면 된다. 엄마는 아이를 통해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이 세 가지 말의 힘을 실감한다. 그래서 인생의 비밀을 알아가듯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