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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May 15. 2016

소소한 관심사

스탠딩 에그


하교 길은 언제나 멀고 길었다. 대학교 4년만 빼고 12년을, 참 많이도 걷던 시간이었다. 특히 이사로 학군에서 멀어져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네 친구 하나 없던 초등학교 시절엔 먼 길만큼의 긴 시간을 혼자 온전히 마주해야 했다.


버스 한 번에 집까지 가는 마땅한 코스도 없었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도 없던 나는 굳이 집에 일찍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일부러 제일 먼길로 돌아가거나 코스를 바꿔가며 걸었고 지루하고 반복되는 하굣길에 스스로 재미거리를 만들어갔다.


길가 간판도 눈에 익혀두고 어느 건물 화단이 더 예쁜지 비교도 하고 시장 아주머니들의 재빠른 손놀림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새로 나온 물건이 없는지 살피기도 하고 지하상가 코팅 집 언니와 수다도 떨며 자못 어른스러운  흉내도 내던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다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면 난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고도 술술 불러내다 한 구절씩 곱씹고 읊조리며 이런 말도 있구나, 이 사람 맘은 어땠을까 생각했고 그렇게 알고 있는 노래들을 매일 새롭게 마주했다.


그 당시 내가 불렀던 노래는 동요도, 만화 주제가도, 음악책에 실린 가곡도 아니었다. 초등학생이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는 사랑노래나 흘러간 옛 가요 같은 것들이었다.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근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 봐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집 안 구석 어딘가에서 찾아낸 통기타 집 가사를 읽고 또 읽다 우연히 라디오나 음악방송에서 듣고 난 다음이면 원래 알았던 노래인양 곧잘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통으로 완창 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많았던 시절 난 혼자 놀아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언제나 머릿속 주크박스를 돌려대며 가사를 음미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한창 놀 나이 노래방에 가서도 모르는 노래는 잘 부르지 않았다. 대강 아는 노래를 기계의 가이드에 따라 박자를 따라가다 보면 음치인 듯 음치 아닌 모습에 흡사 타령을 하는 거 같이 우스꽝스러워졌다.


내가 해석한 대로 멈출 때 멈추고 숨을 쉬어야 할 때 숨을 쉬며 목소리의 크기도 조절하며 노래에 푹 빠져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곱씹고 곱씹던 노래를 외워 한 번에 부를 수 있어야 정말 내 노래 같았다.


그런데 그런 노래를 만나고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시기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자 가요 트렌드는 완전히 바뀌었고, 고등학생이 되자 가사에는 랩이 포함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대학생 때까지는 들을 만하고 나에게 맞는 노래를 종종 만날 수 있어 돌이켜보면 행복한 시기였다.


서른이 넘어가자 오래 두고 듣고 싶은 노래들이 점점 없어져갔다. 최근에는 가사에 신조어들이 난무하고 심지어 영어 가사가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사들이 넘쳐나 외우고 싶지도 않았지만 외울 수도 없는 노래가 태반이었다. 서사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2000년대 초 마을버스 안에서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라는 노래를 이어폰 가득 한 자 한 자 박히듯 전해 듣고 가슴이 터질듯한 감정을 느끼는 일은 그 뒤로 쉽게 오지 않았다. 그 노래는 그 해 작사가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좋은 노래를 모두가 알아봐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요즘 노래, 요즘 애들이라는 표현 자체가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예전 어른 세대들이 내게 했듯 무심한 말로 거리를 두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까지고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젊게 살 줄만 알았던 나는 어느 새 저 멀리 비켜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슬픔도 잠시, 반갑고 다행스럽게도 오랜만에 내 기준 들을만한 앨범을 만났다. 처음엔 괜찮네, 노래 들을만하네, 가사 좀 쓰네 정도였다면 새 앨범이 계속해서 나오고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위한 맞춤형 가수라는 착각까지 들었다. 대체 어디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나는 최근 몇 년 간 노래방에도 가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갔을 때도 부를 수 있는 신곡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서른 중반이 넘어선 지금 더 이상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읊조리지도 않는다. (솔직히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은 그 진한 중독성에 잠시 입에 달고 살긴 했었다.)


노래를 적극적으로 찾아듣지도 소장하지도 않는다. 어떤 노래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던 내가 노래에 다시 홀린듯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그룹을 안지는 한 3년 정도 되었다.

스탠딩 에그, 잃어버린 감성을 일깨워준 노래들 너무 고마워


'스탠딩 에그'의 노래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게 되고 가슴이 저릿해진다. 갑자기 언젠가의 그 자리로 나를 데려가고 이별 후 세상 모든 노래가 내 노래 같은 그 기분에 조금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은 감수성도 되살려 준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예쁜 노래도 많다. 무엇보다 다시 입으로 흥얼거리며 노래 부르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노래를 만들고 직접 부르는 메인보컬이 정말 영리한 싱어송라이터란 생각이 든다. 직접 만들기 때문에 일관된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 노래를 감당할 수 있는 목소리까지 갖췄으니 굉장히 조화롭다. 그리고 부족한 음색은 객원 보컬을 통해 적극적으로 메꿔나간다. 쉽고 솔직한 착한 감성의 예전 가사들에 근접하면서도 복잡하지 않고 세련된 편곡을 더했다고나 할까. 


콘서트에 갔던 날 내 상상 속 모습과 너무 다른 보컬을 보고 흠칫 놀란 기억이 있다. 그 놀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보컬은 익숙한 듯이 "놀라셨죠?"라며 재밌게 응수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단 노랠 더 듣는 게 나으실 거라며 끝나지 않을 것처럼 노래만 계속해서 불러줬었다. 그 뒤로도 실망하거나 노래가 싫어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외모가 경쟁력이 아니라 노래 자체로 승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깨달았을 뿐이다.


정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노래들이 하나같이 맘에 들어 행복하다. 그래도 나는 이 노래를 굳이 찾아 듣지는 않는다. 우연히 차 안 재생목록에서 흘러 나오는 타이밍에만 다시 집중하고 그저 흠뻑 젖어들 뿐이다. 반복적으로 재생해서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게 아니라 한 번을 들어도 온 정신을 쏟을 수 있는 그 충족된 몰입이 좋다.


그러나, 때론 슬프다. 내가 잊고 살았던 어쩌면 잊고 싶었던 감정들을 떠올리는 그 순간이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룹은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더 매력적이다.



추천곡

- 그 자리에 있어

- 사랑한대

- 웃는 것 밖에

- 예뻐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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