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하교길을 시장을 가로지르며 오갔다. 오전엔 버스를 타긴했지만 어차피 반도 못가 다시 걸어야만 하는 코스라 집에 올때는 슬슬 걷는게 오히려 편했다. 학교 앞 분식집보다 조금 비싸긴 했어도 맛깔난 맛에 이끌리던 떡볶이집을 하루가 멀다하고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었다. 그 당시 시장에는 구경할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다고 기억된다.
고등학교 반학기를 앞두고 새로 이사온 동네는 버스노선도 많지 않고 전철도 타려면 마을버스로 삼십분 이상을 나가야해서 몇 년을 거의 고립상태로 지냈다. 교통은 불편했어도 논자리가 남아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 내가 좋아하는 목욕탕도 두 군데나 있어 한적하니 정말 살기에 좋다고 느껴지는 동네였다.
무엇보다 여러 개의 아파트 단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작은 시장하나가 들어서 있어 잊고 있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규모에 비해 없을 것 없이 알차게 들어선 시장은 타 지역 사람에게도 이미 명물이 된 곳이었다. 어느 동네에 사냐고 했을 때 동과 아파트 이름은 잘 몰라도 시장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멀리서도 온다고 했다.
서울로 돈벌이를 하러 다니던 때는 고단한 시간으로 기억되지만 그래도 견딜만 하다고 느끼게 해 준 하나가 일부러 시장 근처 정류장에 내려 걷는 일이었다. 어두울 때 나가 어두울 때 돌아오는 삶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슬슬 걸어 퇴근하는 일이 내 템포를 찾을 수 있고,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도 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때라 이것저것 반찬 거리도 사고 사무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사람사는 느낌을 받으며 느릿느릿 천천히 걸으며 지났다.
식사가 늦어지는 날엔 분식집에 들러 잔치국수 한그릇을 후르륵 먹고 집에 돌아왔다. 양념장이 든 우묵가사리를 사와 티비를 보며 떠 먹기도 하고 주말엔 과일을 사러 들렀다가 떡꼬치나 호떡 하나를 입에 물고 돌아오기도 했다. 낱개 포장된 1~2천원 하는 떡도 눈에 띄는 대로 사왔다.
특이한 구조지만 재래시장 안에는 중형마트도 함께 들어와 있어서 반드시 마트를 가야만 살 수 있는 물건도 함께 사올 수 가 있었다.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시장과 마트는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교통이 조금 불편해도 시장이 있는 동네에 산다는 건 어쩐지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친정을 벗어나 거처를 옮기면서 시장 가까이로 다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어린시절 드나들던 바로 그 시장으로. 번화가였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더 큰 시장도 있었지만 예전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어쩐지 아련한 마음마저 들게 했다.
'석바위 시장'. 그 곳의 이름이다. 심지어 그 곳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내 오래된 지인까지 생겼다. 그녀를 대동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그 시장을 찾아갔다. 오랫만에 찾은 그 곳은 내가 다니던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 되어있었다. 길가와 상점 경계는 깔끔하게 구분되고 캐노피와 차양으로 인해 날이 궂어도 수월하게 장을 볼 수 있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신발을 적시던 바닥 꾸정물도 어쩐지 더이상 흐르지 않았다.
그러한 변화가 이동하고 구경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환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시장 통로가 어두컴컴하고 조금은 삭막해보이는 건 내 기분탓일까.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있는 모습일 테지만 변화된 후 처음 가본 시장과 내가 기억하는 시장이 달라 조금은 어색했다.
낯설기도 하고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익숙하지 않아 붕- 뜬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자주 가지도 못했으면서 기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전처럼 머무르길 바라고 있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되지,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시장도 가고 가끔은 마트에도 가던 내 장보기 패턴은 아이가 생기면서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져만 가고 있다. 생협에서 사야하는 주스와 과자, 한살림에서 구입하는 조기, 온라인 산지직송으로 주문해 먹는 과일, 따로 주문하는 아이 보리차 등 굳이 찾아야하는 가게와 즐겨찾기 되어있는 사이트가 늘어났다. 가끔은 간식과 상비약 구입을 위해 해외배송도 받고 더 가끔은 견과류를 보러 백화점 유기농 코너에도 가곤 한다.
몇년 간 구입처가 다양해진 탓에 당장 시장에서 모든 구입에 대한 해결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당근과 감자를 낱개로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를 식탁으로 불러들이는 마법의 '조기' 가 무척이나 저렴했고 게다가 덤까지 주시니 받아도 되나 쭈뼛거리면서도 왠 횡잰가 싶었다. 내 입맛을 돋울 소금에 절인 오이지도 잔뜩 샀다. 과일은 크게 싸다고 느껴지지 않았지만 직접 골라주는 주인이 존재했고, 조개나 오징어 같은 해물은 확실히 신선하고 식감이 더 쫄깃했다.
나는 여행을 가서도 그게 외국이든 우리나라의 시골이든 되도록이면 그 곳의 시장을 가보려고 한다. 어쩐지 경쾌하고 활기찬 느낌이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서이다. 맛있는 음식과 볼거리가 다양한 곳을 지나다니다 보면 시간도 잘가고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의식하지 않고 그 시간에 충실하게 속할 수 있었다.
나 말고도 시장을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제주도에 여행을 가서도 단연코 핫플레이스는 시장이다. 지난 봄, 일부러 찾아간 동문시장은 현지사람보다도 외지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 줄을 서서 떡볶이와 오메기떡을 사먹는 모습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나이드신 분들께는 생활이지만 젊은이들에겐 놀이가 된 문화, 중년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는 '시장'이라는 공간은 언제나 오늘만 존재하는 듯하다.
어린 시절 시장을 오가며 늘어난 공상과 생각들, 물건을 주의 깊에 바라보는 능력,
아주머니들을 보며 그 이면의 삶을 생각해봤던 상상력, 내가 글을 쓰면서 꺼낼 수 있는 몇가지 안되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모두 그 때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시장'이라는 컨텐츠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현실이 참으로 재미가 있다.
"시장 가자. 반찬 만들자." 15년 전 내가 해주던 밥을 먹으며 함께 공부했던 동생은 이제 내 반찬을 만들어주는 친정언니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 가자. 너무 좋아."
깨끗하고 편리하지만 진열품을 쇼핑하는 마트와 달리 묻고 답하고 흥정할 수 있는 것이 시장이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손대중의 힘이 계량의 힘을 이겨내는 곳,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보며 벅차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곳, 그 생동감으로 아이에게 전해 줄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곳. 언제나 그립고 그리운 곳, 시장이다. 시장엔 언제라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