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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Feb 27. 2017

여행은 결국 무언가를 남긴다

니가 가라 하와이? 내가 갑니다 하와이


여행을 가잔다. '지금 한가로이 여행할 때가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 '못 갈 것도 없지.' 하고 스스로 억지를 써본다. 사실 끌어다 붙일 이유는 많았다. 곧 결혼 5주년이었고, 이직을 준비하며 남편에게는 유급휴가까지 생겼다. 게다가 큰돈은 아녀도 여행경비가 되어줄 퇴직금도 생기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그래도 여러 개인적인 문제가 산재해 있고, 가정 경제는 안정을 기약할 수 없을 듯 보이고, 업무는 가장 바쁜 시기 중 한 시점을 지나고 있어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고른 여행지인 하와이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는 순간까지도 정말이지 이 여행을 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혼자 다녀올래?" 그리고 내 몫의 여행경비는 따로 받아 나 좋은데 알아서 쓰겠노라고, 이건 분명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잠시 이죽거렸다. 순간적으로 어쩌면 내가 정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느낀 남편의 조금 슬퍼 보이는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마음이 약해진 나는 말을 바꾸고 말았다. "그래 가자 까짓 거"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성실과 근면의 전형이던 사람에게 돈 쓰는 재미를 일깨우겠다고 노력한 몇 년 사이 그는 나보다 더한 '베짱이'가 되어 버렸다. 배짱도 좋지. (나보다) 젊어서 배움이 빠른 탓일까? 청출어람이란 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깨달음이 슬프게 다가온다.   


남편과의 여행으로 휴양지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쩐지 내키지 않아 신혼여행도 유럽으로 떠나 지치도록 걷다 돌아온 우리였다. 처음 가는 휴양지, 게다가 아이도 없이 왠지 다시 가는 신혼여행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기대라곤 요만큼도 없던 여행, 그렇게 휴가시즌도 아니고 오래 계획한 여행도 아닌 갑작스러운 하와이행은 또다시 내게 무언가로 남아 버렸다.

공유에서 오는 충족감을 느끼다

무언가 계획할 때 세부사항을 남들과 잘 공유하지 않는 편이다. 혼자 필 충만하여 추진해 버리고, 계획한 일을 알아서 처리하고는 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결과만 통보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결정되자마자 주변인들에게 알렸다. 친구를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닌 내가 그나마 가장 연락을 빈번하게 하는 지인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지인 하나는 액티비티를 강력 추천했고, 다른 한 명은 먹거리 볼거리 일정을 대략 짚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내가 떠드는 걸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함께 여행을 이야기한 덕분인지 여행지에서도 순간순간 자연스레 그들을 떠올렸고, 떠난 적 없는 그들을 나 혼자 이리저리 데리고 다닐 수 있었.   


오롯이 주인공이 된 기분을 얻다

결혼 전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가 여행지에서 예쁜 사진을 가득 담아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웃는구나.' '내가 모르는 이런 모습이 있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즐거웠더랬다. "피사체가 좋아서 사진이 잘 찍히는 거지?"라고 묻는 내게 피사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고 당당하던 지금의 남편은 아이를 낳고 도저히 예쁜 모습의 사진을 건질 수 없는 내게 한동안 내놓을 만한 결과물이 없자 면이 안섰다. 변해버린 내 모습은 애써 무시한 채 그 애정 어디 갔냐는 나의 타박도 묵묵히 견뎌야한 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아이 물건 없이 내 물건만 잔뜩 꾸 나만 꾸미고 나만 살피다 보니 사진 속 내 모습은 다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었고, 남편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또 다른 여행 방식 조우하다

언젠가부터 여행 전 일정을 모두 미리 정하고 이 잡듯 정보를 찾아 헤매 정리를 한 뒤 머릿 속 시뮬레이션까지 몇 번  돌려보고서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2년 전 일본 후쿠오카 여행에서 그런 여행의 폐해를 경험한 후로 나는 여행의 방향을 조금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세세하게 알아보고 가면 새로울 것도 없이 미리 질려버리는 탓에 손을 좀 놓기로 하던 차였다. 현지에서 며칠 간의 전체 동선을 설명해준 블로그 하나를 잠깐 참고하고, 지인들의 말을 토대로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슬쩍 살펴본 후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항공, 숙소, 렌터카가 해결됐으니 세부일정은 가서 생각하자. 무언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취해보기로 마음먹자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나 사람이 정답이다

남편이 숙소로 가장 비싼 곳 중에 하나인 호텔을 선택했다. 무작정 반대하기도, 선뜻 동의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일정 중 이틀은 호텔에서 머물고, 4일은 현지 숙소를 렌트해 비용을 상쇄시키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시도해보는 에어비앤비는 사실상 나의 가장 큰 기대 중에 하나였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지만 잘 될 것 같은 무모함도 늘 통하기 마련이던가? 출발 직전 호스트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집을 비우게 되어 자신의 친구에게 체크인을 부탁해놓았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맞이해 준 그녀'가 미국의 유명 드라마에 나온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액터'라고 인식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겐 한 명의 외국 친구였고,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어도 편하게 대화하고 지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날 온통 시간을 할애하여 현지인들에게 익숙한 코스로 우리에게 투어를 시켜주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공항까지 배웅해주며 결국 날 울게 만든 그녀에게서 나는 인간사의 보편성을 느꼈다. 결국 어디서나 사람이구나.  


비슷하게 생긴 현관의 입구를 잘못 들어서 남의 집 문에 키를 욱여넣는 우리 모습을 여러 번 재현하며 한참을 웃게 만든 뒤였을까? 렌터카를 타고 다녀온 곳에서 사 온 파인애플을 함께 먹자고 내민 순간이었을까? 우리와 만나고 큰 계약 건을 따게 되었다고 신나 하는 모습을 그저 내 친구의 행운처럼 기뻐해 줘서 일까?


어쩌면 멀리서 들려오는 옆 방 기침 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기침 차를 내민 순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이 열렸을 수도 있고 우리의 작은 호의 따위와는 상관없이 단지 그녀가 너무나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가 오는 아침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늘어지게 빈둥대는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다 내가 만든 생선요리로 함께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아이를 시골로 유학 보내고, 남편의 퇴사와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었던 집을 정리해야만 하 엄청한 삶의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걸 너무나 쉽게 결정해버렸다. 어려운 결정 가운데 괜찮을 거라고 나를 다독이는 대신 그 상황에 매몰되기 싫어 어쩌면 조금은 외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항에서 배웅을 받으며 호스트의 고마움에 목이 메는 순간 내 눈가의 눈물을 보며 그녀는 말했다. "힘들지? 힘들 거야. 큰 변화를 앞에 두고 있잖아. 잘 해결할 수 있지?" 따뜻하게 나를 감싸는 말에 '그래 나는 변화를 겪고 있어. 힘든 게 당연한 거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자.'라고 다짐했고 그렇게 전환점이 생기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음 단계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실은 계속되고 그 곳에 존재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금요일에 바로 출근을 했다. 일반 직장인이 쉽게 얻기 힘든 8일간의 일정이었고 하루만 더 휴가를 내면 여독 없이 며칠을 더 쉴 수 있었지만 한 주를 온통 쉴 수는 없도록 규칙적인 결과물이 요구되는 일을 하고 있기에 주말 전 반드시 출근해 업무를 마무리해야 했다. 자리에 돌아오자 지난 한 주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에 나는 방황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요청하고 간 일들''부탁하고 간 일들'이 무리 없이 마무리된 것을 보고 나는 팀원들에게 무한한 감 느꼈다. 사실 내가 하루를 더 쉬었다고 한 들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지 못할 일이란 없다. 어쩌면 나의 출근은 그렇게 내 자리를 메꿔준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였는지도 모른다.


가기 싫은 여행을 다녀왔더니 결국 좋았다는 감문식의 헤피엔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즐기고 보자는 쾌락주의를 설파할 생각도 없다. 여행을 떠나면서 지인들과 결속력을 높였고, 사랑받는 느낌을 다시 얻었으며, 이런 여행도 있구나, 사람 냄새가 가득 나는구나. 그래서 머릿속이 상쾌해진 기분을 어떻게든 기록하고 싶었던, 기억하지 않고는 내가 견딜 수 없었던 오로지 그것 하나가 이 글을 완성시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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