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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Feb 15. 2017

글을 쓰는 시간, 그곳에 내가 있다.

글을 써서 좋은 이유 몇 가지


한동안 글을 조금 썼다. 처음엔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얼마간은 주체할 수 없는 이끌림에 그저 좋아 쓰기도 하고, 가끔씩 이벤트처럼 찾아오는 '방문자 증가'에 신기하고 기쁜 마음이 들어 더 열심히 쓰기도 했다.

     

원래부터 살아오길 생각을 그득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많은 생각들을 어쩌지 못해 그저 꾹꾹 가슴에 눌러 담고 살다 어느 날 문득 주제에 맞게 생각을 구분하며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하는 힘이 자라고 끝까지 그 뒤를 살필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지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제대로 어른이 되어가는 기회를 얻었다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글 쓰는 일을 예찬하고, 누구에게나 독려하고 싶고, 이런 시간을 취미로 둔 나를 가끔은 기특하다고 칭찬하고 싶지만 일반적인 취미생활처럼 그저 편하게 마주하거나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걸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독립된 개체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글쓰기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주고, 특히 '엄마로서의 글쓰기'는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엄마로서 역할을 돌아보고 아이와의 시간을 반추하며 앞으로 내디뎌 할 걸음에 어떤 채비를 해야 하는지 늘 점검할 수 있도록 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요새 심각한 슬럼프를 겪고 있다. 소위 그릿(끈기)의 부재인지, 소재의 고갈인지, 처음부터 역량 부족이었는지, 아님 이 모두 때문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사실 알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글쓰기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 스스로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일임을 잘 알기에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접근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이 글을 써보기로 했다.     


기회를 마주하다.

처음으로 오픈된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읽길 기대하고 쓰는 글이어서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유독 새롭다고 느낀 건 그게 '브런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브런치 이전부터 글을 썼거나 브런치도 동시에 운영하시는 분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웠을 법한 부분들도 기존 블로그를 전혀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PC와 스마트폰을 오가며 글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 유입 키워드와 통계를 보는 색다른 재미, 가끔 내 글이 다음 메인에 걸리고 카카오 채널에 소개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까지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글쓰기를 지속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까지도 해본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본다.

브런치에서 불리는 이름 '유화'는 필명이다. 필명을 쓰는 이유는 좀 더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덧붙여진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닌,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은 뒤 그 글을 정말 '읽히기에 괜찮고 내놓을 만한 창작물'이라고 여겨줄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몇몇 분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감사의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가까운 지인 몇 명과 글에 등장하는 소수에게만 글 쓰는 것을 알리고 매일 익명으로 글을 쓴다는 건 마치 비밀을 간직한 것 마냥 설레었던 순간이었다.    

 

막연함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설렘만으론 이 심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좋은 것일까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글을 쓰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명확해지고, 어휘를 골라쓸 수 있게 된다는 점 때문이란 걸 발견했다. 글을 쓰다 보면 내 마음에 취해 '그게 그냥 그렇다'라불분명한 지시어로 때우고 대강 뭐 그런 게 있다 등 쉽게 마무리 짓고 싶은 문장들을 곱씹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론 특별한 이유없이 마냥 감정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어서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쉽게 써진 글이라 해도 퇴고를 하며 내 글을 반복적으로 객관화시켜본다. 그런 작업을 통해 수식어를 조금 덜어내고 적절한 단어를 찾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도 덩달아 산뜻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짐을 발견한다. 만약 그렇게 걷어내는 작업으로 쉽게 놓아버리기에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면 감정에 흠뻑 젖은 글과 매트한 글을 동시에 써보는 것도 좋은 경험다. 물론 어느 경우라도 우선은 글을 써봐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를 증명하게 한다. 

브런치를 소개해주고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독려해준 남편은 나를 매우 끈기가 없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뭘 해도 조금 시도해보다 말고, 늘 '하기 싫어.' '귀찮아!'를 입에 달고 살기 때문이다. 이건 남편이 내게 냉정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도 늘 인지하고 인정하는 바였다. 그간 크게 의심 없이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살아온 지 언 30여년이란 시간이 흐를 무렵, 그러니까 작년 4월 중순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한 2개월 가량 쉬지않고 꾸준히 글을 올리고 엄청난 몰입을 보이는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남편의 시선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좋아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나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수정한 것이다. 그 사람의 인정을 기대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를 정의할 때 한 가지 설명을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음은 나를 위한 선물일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자신이 좋아서, 신나서,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자극이 된 듯 하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소소하게 달라지는 점들을 늘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다 보면 소통의 부재가 생기기 마련인데 우리 부부는 내가 쓴 글을 통해 자연스레 서로의 공유점을 높이고 있다. 미처 말로 설명하지 못한 내 현재의 상황이나 생각들이 정리된 글을 보면서 남편은 알아서 내 입장과 견해를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던 나는 내 이야기가 재밌다는 사람들을 만나며 여러 면에서 나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한 표현과 객관화된 자료를 위해 작은 것이라도 공부를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내 글의 주제인 아이에 대해 차분히 집중하게 되었다. 글에 대한 소스를 얻기 위함이 아닌 내가 쓴, 내 글에서의 내 말들을 제대로 책임지고 실제로 지켜주기 위해서 말이다.     


추억을 쌓는 것에 소중함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의 글은 이미 내가 만들어 오고 지나온 길에 켜켜이 쌓인 발자국을 하나씩 되짚어 보는 과정이었다. 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내가 사는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다보니 늘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의미들이 되어 주었다. 또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하며 늘 깨인 채 지낸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러다 보니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그려보는 일이 잦아졌고, 그 시간을 또 다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갖고 싶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해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찾게 만든다.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글쓰기에서 멀어지게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나약한 인간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차마 드러내지 못한 내 욕심이 원인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잘 쓰인 글을 접하고 책을 읽는 것이 부담스럽고 겁이 났다.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을 내어주고 나도 해낼 수 있는 표현들을 놓친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람의 표현이 내 글에 묻어날까 조심스러웠고 내 생각을 지배하게 될까 벽을 쌓았다. 지나친 건방이었고, 나는 곧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흘러넘친 글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고 생각의 힘은 잠시 지속될 뿐 결국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책을 손에 들었을 때 거짓말처럼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내 지난 경험과 사색만으로는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나는 비워낼 만큼 비워내고서는 다시 책을 찾아들었고 그때서야 다시 쓰기위해 나를 태울 수 있는 연료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쓰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경우에라도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닐까? 비슷한 수준의, 비슷한 주제의 글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참고의 대상으로 삼아 표절의 문턱을 넘나들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읽을거리들은 그대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머릿속을 시원하게 흔들어 줄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저자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내 평소 의견을 이끌어내면서 그 생각들을 정리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 책 말고 또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책은 늘 내가 원하는 사람에 가깝게 나를 발전시키는 유일한 유인책이다.   

  

이 글 하나를 쓰기까지 펼쳐진 시간과 고심의 흔적이 깊었다. 늘 원래 의도보다 조금 부족한 듯한 글이 써지고 또 가끔은 시작과 다르게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나도 모르던 나의 글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 작업을 한동안 멈출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인책이 되어줄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글쓰기는 내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평범하고 변함없을 것 같은 내 일상에 계속해서 변화가 생긴다. 글을 쓰라고 누군가 등을 떠미는 것 같이 자꾸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또다시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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