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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Aug 14. 2017

받고 싶은 대로 해준다는 것

남편의 시간이 어렴풋이 읽혔다


집 매매 후 정해진 잔금일에 맞춰 계약서 도장날인도 마무리하고 주말에 있을 친구 결혼식도 참석할 겸해서 휴가를 낸 남편이 샌드위치 휴일이 낀 한 주 전부를 인천에서 보내기로 했다. 일주일이 넘는 나름 꽤 긴 시간 동안 밖에 생활을 하는 터라 챙겨 올 짐의 양도 만만치 않고 거기에 내가 부탁한 물건까지 담아 와야 하다 보니 남편은 중간 사이즈 캐리어의 필요를 아쉬워했다. 제주 숙소에 가지고 있는 캐리어는 너무 크고, 짐을 나눠 이고 지고 오기에는 불편할 만한 애매한 양이기에 그 필요에 공감이 갔다.     


그래서 급하게 캐리어 하나를 주문해 남편회사로 보냈다. 어차피 새로 하나 구매할 생각이었기에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번에 새로 구매한다면 이동이 잦은 나를 위해 사이즈도 컬러도 딱 내 취향에 맞춰 고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떠나기 전날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급하게 주문한 터라 어쩌면 출발 전까지 못 받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물건을 받지 못하면 그냥 스트레스받지 말고 수완 좋게 들고 와보라는 말로 미리 최악의 상태를 대비했다. 다행히 출발 두 시간 전에 남편 회사로 도착한 캐리어에 짐을 옮겨 담은 남편은 ‘이따가 김포에서 보자’는 인사로 톡을 마치려 해 나는 잠시 멈칫했다.

    

‘김포에서? 공항 말이지? 아, 내가 데리러 가기로 했었구나!’     


순간 그 말을 취소하고 싶다는 강력한 기운이 뭉글뭉글 올라왔다.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핑계를 잠시 대 보지만 누가 봐도 지나갈 비여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가기 싫은 맘이 들썩이며 이를 어쩌나 한숨부터 나왔다. 힘들어서도 아니고 남편이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디로 나를 이끌지 모르는 답도 없는 내 장거리 운전 실력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지도 보는 눈이 심각하게 부족한 것은 이미 여러 번 고백한 터였지만 아직 말 못 한 두 번의 사건이 진한 불안감으로 피어올랐다.

지난 4월, 구례와 제주를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주말 오후를 보내며 커피 매장에 비치된 잡지를 읽고 있었다. 뜨거운 라떼 한 잔과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며 이 넘치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나 황홀하던 차였다. 저녁 독서모임까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즐기겠노라는 야무진 생각에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갑작스레 친구 아부지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둘째를 임신 중인 친구가 걱정이 되어서도 그랬지만 놀라고 안쓰러운 마음도 잠시 문자에 적힌 ‘장소’ 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장례식장의 위치를 확인하며 과연 내가 이곳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중교통은 답도 없고, 그래도 옆에 누가라도 있으면 운전하는 게 좀 나을 거 같아 동생에게 급작스럽게 SOS를 쳤다. 흔쾌히 동행을 수락하는 동생에게 차는 내차로, 운전은 내가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늘 언제나 자기 차로 나를 태우고 다니는 동생에게 이번만큼은 신세를 질 수도 없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운전에 대한 과보호에서 벗어나 -나이 마흔을 앞두고- 이제는 독립할 때가 되었다 싶기도 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차도 많이 막히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벚꽃 길까지 보며 어렵지 않게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난 슬픔의 마음은 잊고 잠시 의기양양함에 젖었다. 그러나 문자에 적힌 호수를 찾지 못해 살짝 당황하며 내가 도착했어야 할 곳이 그냥 서울대 병원이 아니고 ‘분당’ 서울대 병원이라는 사실에 바로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걸 두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라고 하는 건가? 어떻게 다시 가지?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내 능력의 최대치를 사용하고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냥 집으로 갈까 잠시 망설여졌다. 만약 내가 가기로 한 장소가 돌잔치나 결혼식 같은 축하의 자리였다면 어쩌면 좀 더 안쓰러운 내 사정이 먹혀 어리광을 부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차를 돌려 인천으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를 잃은 친구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집에 가서 편하게 잠들 수 없다는 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아부지 상을 치른 친구가 지난달 둘째를 낳았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만삭인 친구의 눈물을 닦아주던 나는 그 친구가 낳은 아기를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어 다시 차를 몰았다. 이번에는 동행자도 없이 온전히 혼자였다. 역시나 차도 안 막히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아 어느새 고속도로 운전이 할 만하다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하룻밤 지내면서 큰 아이랑 좀 놀아주기도 하고 둘째 수유도 시간 맞춰 도와주다 올 요령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 날로 돌아오게 되었다. 밤길 운전을 해야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쩐지 돌아오던 길도 무척이나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다 어버버 한 번 삐끗 잘못 들어선 길에서 운명이 갈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5킬로짜리 터널을 반복해 오가고 결국 여섯 번의 요금을 냈다. 불안한 눈빛과 뜬금없는 길을 묻는 내 사정을 대략 짐작한 요금소 아주머니들이 온갖 위로의 말을 던졌지만 패잔병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제발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랬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김포에 가야 한단 말이지? 내비로 예측시간을 보니(이걸 확인하는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다) 회사에서 55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멀진 않은 것 같고 왠지 또 자신감이 생겼다. '할 수 있다' 마음을 다 잡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비행기가 8시쯤 도착이니 공항에 가면 시간이 엄청 남을 것 같은데 회사 근처 서점에 들러 책이라도 보고 출발할 걸 너무 일찍 출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들뜬 마음마저 들었다. 회사에서 출발하니 인천대교를 타고 인천공항 쪽으로 가다 중간에 다시 서울로 향하는 그런 신기한 코스로 안내를 했다. 요금이 비싸긴 했지만 전혀 막히지도 않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막히지 않고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는 이 똑같은 패턴에서 나는 살짝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어야만 했다.)      


비가 온 뒤라 그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이었다. 석양이 지기 전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인천대교’와 ‘하늘’과 ‘알맞은 시간대’가 만들어낸 장관을 볼 수 있음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운전도 어렵지 않고 라디오를 통해 ‘한바탕 웃음으로’라는 노래에 얽힌 배경도 듣고 모든 것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이제 곧 목적지였다. 남편이 오면 함께 구례에서 아이를 데려와 일주일 동안 세 식구가 함께 좋은 추억을 쌓아야지, 작은 계획들로 생각의 나래를 펼쳤다.

공항에 거의 근접해 표지판을 보며 국내선과 국제선으로 갈리는 길목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국제선으로 들어섰고 바로 이어지는 한산한 주차장에 무사히 안착했다. 지금 다시 왜 국제선 주차장으로 들어갔는지를 묻는다면 뭐라 정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주차장이 거기 있었고, 언젠가 남편으로부터 김포공항은 주차장이 멀어 (걷지 않도록) 나를 입구에서 바로 픽업하기 위해서는 늘 주변에서 몇 바퀴 돌다 시간에 맞춰 온다는 말이 기억났기 때문인데 이 엄청난 기억력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주차장이 멀어서 국내선과 국제선이 함께 있는 건가, 넓게 지으려고 멀리 해놓은 걸 수도 있겠구나 혼자 결론을 내리며 주차를 하고 나가려는데 이상하게 나갈 만한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동이 켜진 차로 무작정 다가가 운전자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몸을 한껏 낮추고 은밀하게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는 너무 당황해 미처 담뱃불을 끄지도 못하고 차에서 내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묻는 나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는 게 분명한 에스컬레이터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었는데 너무 미안한 마음에 하시던 것 마저 하시라는 표정과 감사하다는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다시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관리나 청소 쪽 일을 하시는지 유니폼을 입으신 분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국내선 청사로 가고 싶다는 내게 아저씨는 셔틀을 이용하라고 하셨다. 순간 아무리 주차장이 넓고 멀어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짐을 든 남편에게 셔틀을 다시 타고 오자고 하면 왠지 잔소리를 들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요금소 아주머니에게 국내선 주차장으로 가려면 나가서 왼쪽이라는 안내를 듣고도 오른쪽으로 빠져버렸다. 왜 그런지 묻는다면 이것도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길이 너무 빨리 나타났다고 할 수밖에. (아, 말을 하면서도 내가 무척이나 모지리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표지판을 보니 인천공항으로 다시 가거나 방배동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울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렇게 쉽게 울 수 있는 그런 날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자, 주차만 하면 된다. 조금만 더 해보자. 다행히 표지판을 보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왼쪽 차선을 선택해 1차선에서 U턴에 성공했다. 다시 국내선 주차장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간 곳도 국내선 주차장은 아니었다. 주차장을 들어가는데 입점 업체들이 하나하나 광고되어 있는 걸 보고 여긴 롯데몰이란 걸 알았다. (어처구니가 없다.)      


살짝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 와중에도 '무인양품 김포공항 점'을 못 와 본 게 아쉽단 생각을 하며 주차요원의 안내에 따라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재도전 끝에 국내선 제2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주차타워로 들어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몇 바퀴를 돌아 심지어 지상주차도 성공했다. 밖은 이미 어둑해졌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었다. 미리 와서 공항 서점에라도 들리려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제1주차장을 건너 공항청사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으로부터 도착 문자가 왔다. 나도 두 시간 걸려서 좀 전에 도착했다는 답을 보냈다. 이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덧붙였다. 겨우 도착해 숨차고 힘들고 짜증 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의 마음이 컸다. 참, 그 시간에 오려고 계획했어도 이렇게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늦지 않은 게 어디냐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대견했다.

     

출국장이 보이는 벤치에 앉자마자 주문해준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남편이 보였다. 내가 먼저 발견한 것이 왠지 좋아 잠시 남편을 지켜봤다. 길고 고단했을 하루의 무게가 무색하게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그 사이 남편도 나를 발견했다. 나를 향해 방향을 튼 남편과 서로 마주 보며 우린 잠시 웃었다. 서로가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무용담 늘어놓듯 주거니 받거니 하며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맛이 없고 정말 값어치를 못하는 부실한 상차림이었지만 그 누구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냥 그 시간에 맞춰 무사히 둘 다 그곳에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식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나를 데리러 올 때 남편이 겪었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남편의 시간이 어렴풋이 읽혔다. ‘고생했겠네. 귀찮기도 했겠다.’ 나는 다른 어떤 배려보다 남편이 데리러 나오는 것을 바라면서도 내가 나가는 걸 마다하는 남편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듣기만 했었다. 그리고 꽤나 긴 걸음을 걷는 동안 자연스레 친구를 떠올렸다. 남편을 데리러 올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운전연습을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내 우정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직계가족의 장례를 처음 치를 때도, 시집갈 때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먼 길을 혼자 달려와 함께 해준 친구의 마음 씀씀이가 먼저였다. 내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내가 받고 싶은 대로 해 주는 것에 대한 '배려'와 '책임감'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캐리어를 끌면서도 배낭을 메고 쇼핑백까지 들어 여유가 없는 남편의 손을 굳이 잡았다. 손끝의 따뜻함이 가슴까지 전해졌다. 내 노력도 온기가 되어 남편에게 전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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