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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Dec 20. 2017

마흔, 마음의 소리를 듣다

마흔을 맞이하는 방식


어느 날인가, 꽤 무더웠던 날씨로 기억된다. 지인의 집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와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진에 찍힌 모습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어 눈을 떼지 못했다. 클로즈업 찍은 사진 속 피사체는 한쪽으로 꽂은 머리 옆에 예쁜 꽃 한 송이를 달았고 얼굴에는 건강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밝은 미소가 예뻐 언니에게 무슨 사진인지 물어보니 동생의 ‘포리(Forty) 파티’ 날에 찍힌 사진이라고 했다.       


‘마흔 살 파티?'      


그런 것도 있구나. 동갑내기 영국 남자를 만나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사진 속의 주인공은 ‘사십(Forty)’이라는 나이를 축제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마인드는 문화 차이에서 오는 건지, 이 파티는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영어 표현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이런 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특별한 정보를 찾진 못했다.

     

보통 ‘중년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40’이라는 숫자가 이토록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올지는 몰랐다. 나는 어쩐지 그때부터 더 이상 마흔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색다른 파티를 열어야 할지 두근거리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내년에 맞이하게 될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다시 한번 빛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가끔 마음속의 그 사진을 꺼내보며 즐거운 상상과 어떤 이벤트를 준비해야 하는지 싫지 않은 고민만을 하다 불현듯 코앞으로 다가온 마흔 살을 앞두고 파티 수준을 가늠하는 정도의 고민이 아닌 내 앞으로 남은 인생과 직결된 고민을 해봐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강박 일지 몰라도 나이를 만으로 세자는 남편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젊음을 유지하고

가정을 잘 꾸리고

일로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사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너무 단순할지 모른다. 또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의 균형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과욕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들이기에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어 보기로 했다.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가?

나이 서른을 넘기며 그때 당시 나는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했다. 너무 별거 없어 시시할 정도였다. 애어른이었던 내가 열일곱에 바라보며 그리던 서른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스스로가 인정해주지 않으니 등 떠밀려 나이만 먹는 형국이었다. 서른두 살이 되고, 서른네 살이 되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삼십 대라는 굴곡’을 나는 아이를 낳고 체력과 외모가 무너지면서 무릎이 꺾이듯 받아들였더랬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건강을 회복하고 예전 모습을 되찾으면서 더 이상 나이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걸 보면 젊음을 유지하기보다는 그 누구보다도 나이에만 집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가정을 잘 꾸리고 있는가?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있어 한심할 따름이다. 금요일 저녁이면 식탁에 둘러앉아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일과여야 했다. 언제든 지치고 풀 죽어 돌아온 내 사람들을 기꺼이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에 이미지 노예였던 나는 지금 남편과 아이를 뿔뿔이 떨어뜨려놓고 독거노인처럼 고요하고 느리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언젠가 다시 이어 붙일 내 가정의 모습에 ‘오늘이라는 시간’을 담보 잡힌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새어 나오는 무거운 한숨이 내 변명과 진실이 다를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가?

진작 패잔병의 기분을 맛본 상태였다. 나는 내 업무를 천직이라 여기고 숙련되고자 애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도 못하면서 뒷짐 지고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중간에 낀 형국이랄까? 예전만큼의 열의와 성의도 보이지 못하면서 그에 반해 현재까지 얻어내지 못한 대우와 부족한 성과에 대해 스멀스멀 불만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차였다. 늘 감사히 여기고 겸손해야 했지만 중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이곳저곳 오가며 몸이 바쁘다는 핑계로 잠시 진짜 생각을 멈춘 건지도 모른다. 좋은 점도 있었고 실제로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고 방치하기엔, 계속해서 타성에 젖어 살아가기엔 나는 너무도 젊었다. 내가 마주하고 고민해야 하는 목록들이 분명해지자 꽃 달고 파티하는 정도로 즐거워만 하기엔 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생각하니 ‘포티 파티’ 건 ‘마흔 살 생일’이건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만 바뀌는 말장난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그건 50에 해도, 60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때 나는 더 환하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 내 나이가 언제든 늘 파티라 여길 수 있도록 그 사진의 발견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으리라.      


지금 나는 중년의 삶 중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조금은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들어서기로 했다. 그러니 변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배워야 한다. 마음속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음에 집착하지 않고, 가족이 다시 뭉칠 준비를 할 동안, 우선 그 시간 안에 그나마 가장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여겨지는 ‘일’에서 나는 변화를 찾기로 했다.      


제일 먼저 가장 정신없고 일이 많은 부서 중에 하나인 곳으로 ‘부서이동’ 신청을 했다. 마흔을 앞둔 지금 좀 더 배우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교차하던 차였다. 신청부터 발령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더위가 막 가실 무렵 예상치도 못한 공지를 받은 건 금요일 오후였다. 토요일에 나와 짐을 옮기고 월요일부터 자리를 바꿔 앉았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인생에 큰일일수록 대담하게 대처하는 편인 내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누가 날 걱정해주든, 왜 거길 갔는지 의문을 갖든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시작은 자료의 수집과 축적이었다. 눈이 빠져라 자료를 읽고 이 자료들을 취합해 머릿속에서 굴리고 내 몫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주위를 살펴댔다. 하지만 허공에 대고 노를 젓고 마른 바닥에서 헤엄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망했구나!’ 하는 기분이 드는 순간,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외우기가 안 되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나이가 드니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져 이해와 도출에 좀 더 수월해진 면도 있는 반면 용어를 암기하고 절차를 숙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웃음이 날수록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좋은 게 좋은 거다’를 알아 갈 때쯤 갑자기 스스로에게 혹독해지자 몸이 당황했는지 눈이 쑤시고 진물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아침에 눈 화장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안과를 찾았다. 핏줄이 서고 다래끼처럼 염증이 올라오니 화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운전에 영향을 줄까 싶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짜 이러다 시력을 잃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서 손수건을 늘 가지고 다니며 찍어내야 해’ 병원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릴 적 할머니 말씀이 가슴에 저릿하게 생채기를 남기며 스쳐갔다. 나는 겪을 일이 없거나 조심하면 되는 거라 여기며 노인이 되는 일은 초라하고 불편한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달 아들을 보러 멀리 와주신 지인분이 대화 끝에 나이가 들어서 제일 속상한 점은 시력이 나빠지고 눈이 아파 책을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없다는 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예전처럼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그런 말들을 이렇게 빨리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신기했다. 몸이 힘든데 최소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괴롭고 힘들고 도망가고 싶고 그런 게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한데 슬쩍 웃음도 나왔다. 어쨌든 내가 원한 일이었고 좋든 싫든 내가 선택한 부서였다. 나는 매일매일 집중할 수 있어 살아있음에 흥분되면서도 실체없는 기대에 혼자 부흥하느라 맥없이 바빴으며 머리 쥐어뜯고 싶을 만큼 부족하다고 느끼는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도 뭐가 부족한지 알게 되니 좋은 점도 있었다. 이 김에 채워갈 기회를 얻고 다시 한번 신참자의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랬다. 잘해보라고 교육도 보내주니 기꺼운 마음으로 따랐다. 기다려준다는 신호였다. 회사가 기다려준다고 부서원들 혹은 후임들보다 마냥 모르는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리는 없을 거라 판단한 꽤 복잡한 신호였겠지만 상관없었다.


이 자리에서 세 번의 월급을 받는 동안 나는 월급 몫을 다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고군분투했다. 부끄러웠고, 부끄럽다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 부끄럽게 앉은자리가 불편해 내가 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수정해나가며 그릴 수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이전 자리에 그냥 있었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면 결코 얻지 못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되겠 안주하거나 내 이동에 영향을 끼친 사람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딱 3개월이 지났다. 나를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예민한 시선들이 조금씩 잦아 들었다. 완전히 걷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 스스로가 좀 숨통이 트였다. 잘해서가 아니라 태도를 인정받은 것이다. 분위기로 알 수 있었고 불러 말하니 받아들였다. 나는 아직 멀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한 해를 넘기기 전 이만한 보람이 없다 싶었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싫은 것도 피하게 될 줄 알게 되었고 미움도 희미해지길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건만 최근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모를 심란함과 싱숭생숭한 마음은 도무지 감내해낼 수가 없어 마음이 붕 떠 있었다. 아직도 비우지 못하고 아직도 탓하며 다른 방도가 없어 다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틀 밤을 울고 나서야 쉴만한 마음의 자리가 필요함을 절감했고 집착하듯 몰두하고 있는 업무와 관련된 텍스트로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은 강구책이기도 했다.      


손길 가는 대로 고른 책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늦지 않았다. 배워라 그리고 변화하라. 특히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책으로 김정운 작가는 내게 큰 위로와 공감을 주었다. 삶의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사람, 장소, 관심을 바꿔야 한다고 말해 주면서. 그 변화의 항목 중에서도 관심이 제일 중요한데 그 이유는 관심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삶의 장소도 바뀌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나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 스스로 안 되면 남에 의해 억지로 바뀌게 된다. 아, 세상에 그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해 이토록 누군가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모든 말이 새롭고 모든 것이 공감되는 그런 나이 마흔이다. 오늘도 가만히 내 마음속 말에 귀를 기울여본다. 언젠가는 나를 홀린 그 사진만큼이나 밝고 예쁜 미소가 담긴 중년의 모습을 사진에 남길 수 있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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