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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an 13. 2018

다시 꿈꿔본다, 추억이 될 공간

<어느 건축가의 은밀한 기록, 여행의 공간>을 읽고

이 책이 좋은 건 어딘가 있을 법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책, 바로 그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나타주어 신나고, 내용이나 필력 등에서 원하던 만큼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 고맙다. 그리고 이 책이 정말이지 혼자만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좋은 건 무엇보다 작가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만든 정보 때문이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행동과 역할을 솔직하게 뿜어내고 이를 누가 보든 안보든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점이 놀랍다. 누가 시켜서는 도저히 못할 것처럼 보이는 숙소의 설비와 가구, 기구, 비품 하나까지 조사하는 이 자료수집이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건설사의 데이터로,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자료로, 신문사 기고를 위한 원고로 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긴 했지만 그것이 이 작가의 노력을 깎아먹을 정도로 대단한 실망감이 되지는 않았다.      


지난해 겨울 초입이었다. 남편이 잠시 일을 보기 위해 인천에 올라왔다가 다시 제주로 가기 전날 둘이서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호텔을 예약했다. 뜬금없어하는 남편에게 공항 이용을 편하게 해주겠다며 짐짓 선심 쓰듯 말했지만 사실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었던, 언제나 내 마음속 장소인 ‘남산 하얏트(Grand Hyatt Seoul)’에 다시 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추억으로 존재하던 공간은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았을 때 생각보다 별로여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우선 호텔 주변이 너무나 붐볐고, 교통 체증으로 인한 정체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호텔 내 행사로 인해 주차 또한 쉽지 않았다. 호텔을 눈앞에 두고 차 안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낼수록 본전 생각이 나서 기분이 점점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들어간 객실은 어쩐 일인지 기억보다 좁고 침구 또한 뽀송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층마저도 원하던 층이 아니어서 기대했던 뷰와 야경을 즐길 수 없었다.       


비싼 값을 치른 결과가 이렇게 되자 “여기 얼마랬지?”라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알아서 당분간 마사지를 받지 않겠다는 대답으로 다음 질문을 무마시켰다. 어쨌든 불쾌한 기분을 겨우 추스르며 이제 더 이상 호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지 않을 무렵 재밌게도 이 책을 만나 다시 한번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여행의 공간으로 물론 꼭 호텔이 아니어도 좋다. 호스텔, 민박부터 크기와 목적 또한 참신한 게스트하우스, 호텔형 콘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통째로 빌리는 가정집의 형태까지. 최근 들어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숙소가 많이 지어지고 있고 이용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작가는 그 많은 형태의 숙소에서 굳이 호텔을 골랐다. (물론 작가가 호텔을 투어 하던 시기는 아주 오래전이라 비교가 어렵긴 하다.) 호텔이 주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콤팩트 한 공간의 사이즈를 직접 재고 평면도로 정리하여 우리에게 소개한다. 자그마치 69곳이다. 거기에 호텔과 관련한 역사, 그 주변의 풍경, 작가의 경험까지 녹여낸 글을 보며 어찌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많이는 아니어도 그간 십여 개국의 국가를 여행해봤고 국내의 이곳저곳에서도 머물러 봐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비슷하면서도 색달랐던 속소들의 전경과 속속들이 내부가 책의 호텔들과 매칭 되며 추억 여행과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작년 스스로에게 가장 큰 이슈이기도 했던 집을 처분한 일과 업무를 이동하며 느낀 그 심란함 속에서 그나마  내게 일말의 구원이었던 점은 앞으로 내가 맞이하게 될 새로운 숙소에 대한 기대였다. 집이 없으니 집에 드는 유지비용으로 좀 더 좋은 숙소 투어에 쓸 여력이 생길 것이고 출장이 잦은 업무라 어떤 식으로든 밖에 잠을 잘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내가 숙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먹기까지 갖게 된 습관과 취향에 호텔이 끼친 영향이 실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치약에 확신을 주었던 곳, 풍부하고 질 좋은 녹차로 나를 가루 녹차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 외국어를 학습이 아닌 쓰임의 형태로 만나게 해 준 곳, 그래서 단어 하나를 이해하기까지 많은 사유를 할 수 있게 한 곳, 특히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며 온 몸을 휘감는 편안함으로 나를 이끌었던 곳. (그게 남산 하얏트였고 이 책에서도 소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관심이 많지 않았던 뷰티나 코스메틱 제품을 구입할 땐 호텔에서 사용해봤던 어메니티가 기준이 되었다. 새로 살 침대는 하얏트에서 느껴본 편안함이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무인양품의 침대와 침구를 만났을 때 가격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더 좋은 고급사양의 침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가격 대비 놀라울 정도의 만족감을 선사했고 그렇게 좋은 제품을 하나씩 알아가는 반가움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상식이 많아지고 취향이 선명해지는 이런 눈을 키울 수 있었던 것 모두 호텔에서의 경험이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돈이 드는 불편함도 있지만.   

또한, 호텔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기도 하다.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여유 넘치고 질 좋은 옷과 깨끗한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다. 게다가 그 나라의 숙소를 이용하면서 생활양식들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도 있다. 변기 옆에 나란히 놓인 낮은 세면대를 보고 신혼여행 내내 궁금하면서도 현지에서 묻지 못한 것을 나는 한국에 돌아와 검색을 통해 그것이 비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머물고 싶은 호텔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단 한 번도 가고 싶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발리 섬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조식은 작은 새들과 함께 테라스에서 할 수 있다는 <The Oberoi>가 있기 때문이다. 목욕을 좋아하면서도 익숙한 문화로는 늘 일본 료칸밖에 모르던 내가 <Yesil EV>를 알고 터키식 목욕탕 체험을 하고 싶어 졌다. 그리고 드디어 오키나와에서 아이와 함께 여행 시 예약해도 될 만한 호텔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에어비앤비의 형태로 머물렀는데 그 집은 오로지 다이닝룸과 거실 마루가 일체형이어서 무지 넓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되었다. 아이와 하는 여행에서 호텔을 잡기에는 벽과 침대 사이 공간이 좋아 부담스럽기도 한데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호텔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The Naha Terrace>를 통해 지불가능한 금액으로 어느 정도 여유로움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얻었다.      


‘호텔의 방은 휴먼 스케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호텔이 태생적으로 ’ 여행자의 숙소‘라는, 이방인이 하룻밤을 보내는 편안한 공간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게스트룸은 인간이라는 자연을 감싸는 공간이다.’     


책을 읽다보면 새로운 용어의 쓰임 등은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평상시  막연한 느낌에 대해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휴먼 스케일, 휴먼 사이즈’라는 단어가 그랬다. 세면대나  탁자의 높이, 책상의 위치 등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샤워부스 안 타일의 문양을 관광지 속 그 어떤 광경보다도 감탄스럽게 바라보며 화장대 주변 장식이나 의자, 비품 등의 배치를 통해 행복해하던 내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런 편안함과 감탄은 설계자들의 노력과 실리추구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그나저나 호텔로 출발도 하기 전 벌써부터 새로 사고 싶은 ‘캐리어’가 생겨 눈에 아른거리니 뭔가 주객이 전도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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