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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l 14. 2018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린 뉴질랜드

22살은 어렸고 내가 만들 인생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뉴질랜드에서 머문 몇 개월의 길지 않은 생활과 기억이 내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나를 이리도 흔들어 댈 줄은. 자라면서 뭐 하나 사달라고 크게 조른 적 없던 내가 뉴질랜드에 가겠다고 하자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정까지 시간을 그리 길게 끌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흔쾌히 비행기 표를 끊어주셨다.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면서, 왜 가는지, 얼마나 있을 건지, 가서 뭘 할 건지조차 묻지 않았다.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해 도심까지 어떻게 도착한 건지 사실 과정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생각한 거와는 좀 다르다는 정도일 뿐. 사실 생각한 게 뭔지도 모른다. 공항에서의 소란한 광경, 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햇빛이 강했다는 정도나 기억하려나. 지금처럼 정보가 많아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간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간 것도 아니고 그저 도움을 주실 만한 한국분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뉴질랜드 관련 동화책 한 권을 읽은 게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굳건했던 이미지의 상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또렷한 몇 가지 편린들 속에 제일 처음 한 일로 기억되는 것은 양털이불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나는 뉴질랜드에서 대부분을 말로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고 눈치껏 파악하며 깨달았다. 우리나라와 달리 난방을 하지 않아 밤이 되면 바깥 온도와 크게 차이 없을 정도로 추워진다는 사실을 밤새 덜덜 떨며 깨우쳤고, 그래서 자연스레 온돌바닥이 주는 아늑함과 고마움의 깊이도 알았다. 집안에서도 겨울용 슬리퍼를 신는 경험을 통해 한국 집에 돌아와서 한겨울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반팔을 입고 지내는 것이 적절치 않은 행동으로 여겨져 되도록 보일러를 끄거나 외출로 돌려놓는 습관이 생겼다. 또한 4계절이 뚜렷한 날씨의 구분보다 일교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선글라스는 멋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것, 학교에는 의무적으로 모자를 준비해 보내야 하는 것을 보며 아이들에게 모자를 씌우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일이라 여길 수 있게 되었으며 아이를 낳고 ‘모자 책’의 존재를 쉽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아이에게 늘 모자를 씌워주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계절이 반대인 나라에서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보는 경험은 특별했지만 어쩐지 모든 게 낯설고 두리번거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부모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외로움을 유난스럽게 탔던 것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왠지 모를 울적함과 쓸쓸함은 달랠 방도를 몰랐다. 이런 것이 향수병이라는 거구나. 그야말로 'homesick'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 나라였다. 홈스테이의 호스트가 처음의 친절과는 다르게 모든 것의 경계를 구분 짓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해 며칠 만에 아파트를 얻어 나온 뒤에 한국에 가고 싶어 공중전화를 부여잡고 있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그 흔한 포장마차 하나 없는 메인 스트릿의 어두운 밤거리에서 나는 저녁이 주는 평온함을 담보로 늦게까지 일해서 먹고사는 고된 한국을 그리워했다. 돌아오는 비행 편으로 이용한 국적기에서 한국 신문을 보고 뭉클했던 마음에 순간 애국심은 말로 강요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밀리의 특별한 모자, Google 검색

학생티를 벗고 막 성인이 되어가려는 아가씨에게 그곳은 너무나도 드넓은 세상이었다. 한국과 다른 라이프스타일, 다른 먹거리, 그리고 다채로운 인종과 언어까지 새로움, 그 자체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품질 좋은 육류와 신선한 유제품이 널려있고 저렴하다는 사실이었다. 공산품은 비싸서 렌즈와 건전지, 양말 등은 한국에서 공수받아 쓸 정도였지만 주스와 요구르트만큼은 양껏 즐기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특히나 같은 ‘소’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먹는 부위가 다른 탓에, 아니 다른 덕에 차돌박이 같은 부위를 저렴한 가격으로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아침저녁 할 것 없이 그렇게 먹어댄 탓에 당시 단번에 몸무게가 5kg이 찌는 변화를 처음 겪었다.


뉴질랜드를 이야기할 때 뭐니 뭐니 해도 골드키위의 존재를 빼놓을 수가 없다. 번거롭게 깎아 물컹하게 먹는 것이 아니라 반으로 뚝 잘라 스푼으로 듬뿍 떠 한 입 가득 먹으면 기존에 알고 있던 초록 키위가 아닌 노란색 키위의 신선함에 놀라고, 시지 않고 단 맛에 두 번 놀랐다. 더욱이 키위는 뉴질랜드 사람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또한 새 이름이기도 해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너무나 친숙해진 이름이다. 최근 농수산식품 관련 기관에서 발간한 지구촌 리포트를 읽 ‘일본 소비자 취향저격에 성공한 뉴질랜드 키위’라는 제목에 눈길이 갔다. 맛있고 예쁜 것 좋아하는 입맛 까다로운 일본이 선택한 이유에 절로 공감이 되었다. 무얼 접하든 그야말로 내 곁에서 살아 숨 쉬는 뉴질랜드가 아닐 수 없다.

가장 큰 문화충격 중 하나는 버스였다. 고등학생까지 종이 회수권을 쓰고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교통카드를 써 본 한국 학생에게 Monthly 카드(한 달 자유이용권)의 존재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심지어 스테이지 별 금액을 차등하여 다른 요금을 부과하는 것도 무척이나 합리적으로 보였다. 나는 늘 왜 한 정거장을 가는 사람과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 동일한 요금을 내야 하는 건지 궁금했었다. ‘왜 버스는 제 멋대로 오는 걸까’, ‘왜 버스 정류장에 그 흔한 앉아 있을 곳 하나 없는 걸.' 오랫동안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버스문화에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불합리하다고 느끼고 궁금해하던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있었다. 나는 처음 뉴질랜드 버스정류소의 의자를 보고 눈을 떼지 못했고 버스 시간표라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지킨다고? 그런데 제시간에 버스가 도착하자 나는 실제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측되지 않는 도로 사정과 교통체증의 출퇴근길에 10년 가까이 버스 통학을 하며 늘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하던 나는 운전기사의 곡예 운전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 나름대로 좋았노라고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사실 그 당시 대부분이 주먹구구식 운영이 많았다. 그런 경험들로 인해 선진화된 서비스에 더 절실하게 편리함을 느끼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래서 버스 드라이버에게 'Thank you, Driver!.'라고 말하며 내리는 승객들의 짧지만 존경이 담긴 인사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제일 먼저 배우고 싶은 문화였고 내가 가장 용기 내어 자주 쓰는 영어였다.


영어를 배우겠다고 간 어학연수였지만 실제로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영어는 거의 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고 비디오 렌털 점에서 한국 예능을 대여해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주말을 앞두고 수업에 출석한 사람이 나 혼자뿐이어서 선생님과 부둣가로 짧은 소풍을 가며 1대 1 대화를 한 경험이나 우체국에서 내 앞으로 온 소포를 찾으며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며 느낀 감정들이 내가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영어공부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언제나 문화와 동기부여의 자극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먹거리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강렬한 듯하다. 캐러멜 알갱이가 씹히는 호키포키 아이스크림도 처음 먹어본 곳,  너무 딱딱해 커피에 녹여먹던 생강과자도 처음 접한 곳이라 지금도 이 두 가지는 가끔 먹고 싶을 정도다. 어르신들이 고단했지만 힘들었던 과거를 좋은 때로 기억하는 이유가 어릴 적 먹은 음식 때문이라면 그 심정을 조금은 알 듯하다. 이렇게 좋은 기억이 가득한 뉴질랜드를 떠나며 언젠가 다시 꼭 와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갈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공교롭게도 지루하도록 길었던 비행시간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비행기 안에서의 기억이 어쩐 일인지 공포로 남아 몇 번이고 악몽을 꾼 경험이 있다. 그래서 뉴질랜드를 다시 가는 것을 주저했는데 작년 하와이 여행 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다섯 편을 내리 돌려보며 10시간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우연히 공포를 극복하게 되었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그곳에 함께 하고 싶다.


내가 아이와 뉴질랜드에 가고 싶은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던 나란 사람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것도 뉴질랜드가 시작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계절이 반대인 나라에서 한겨울 날씨에 반바지 차림으로 귀국하던 나는 겨울 잠바를 들고 마중 나와 서있던 부모님과의 대화를 잊지 못한다. 뉴질랜드에서 뭐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그곳은 아이를, 그리고 여성을, 세 번째로는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문화였다고 대답했다. 그러곤 남자는 제일 꼴찌라며, 웃었지만 그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자라던 환경과는 확연히 달랐고 특히 아이에 대한 배려가 가장 돋보인 건 도서관에서였다. 지금은 그런 공간이 많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도서관에서 어른들을 위한 열람실을 제외하고 유아들만을 위한 공간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쿠션에 기대 눕고 약간은 부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독립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때 부모와 아이가 도서관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내가 그리는 미래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저 모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금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그곳에서 배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뉴질랜드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창 유행 중인 의류 건조기가 거기서는 이미 대중화되어 사용하고 있었다. 세탁이 끝나면 빨래는 널고 마르길 기다리기보다는 건조기를 통해 건조하고 바로 개서 정리했다. 싱크대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있어 설거지 후 버튼을 누르면 분쇄되어 내려 보낼 수도 있었다. 이게 무려 18년 전이다. 또한, 재미난 것 중 하나는 동양 사람들 간의 문화 차이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위생 예절은 부족하지만 개인위생은 철저히 해 공동 음식엔 공동 젓가락을 썼고, 일본 사람들이 보여준 실용적인 옷 스타일과 명품을 대하는 태도 등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이외에도 언급할 수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치안이 좋아 공공교육에서 경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배우고, 공공시설인 공원 내 화장실은 늘 깨끗하고 휴지가 구비되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아이와 함께하고 아이를 배려하는 문화, 공원 속을 베어풋(맨발)으로 누비며 깨끗하고 넓은 공간을 즐기는 문화, 지상 마지막 낙원이 모토인 나라, 바로 그곳이 뉴질랜드였다. 하필 처음 와본 외국이 가장 깨끗하고 고요한 나라라서 그다음 여행지에 고민이 생기겠다는 말도 참 자주 들었지만 설마 했던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그에 반해 으리으리하게 발전한 느낌은 아닌데 시설 면에서 압도하는 부분이 있어 특히나 스키장 같은 데는 자연경관을 크게 해치지 않고 보존하면서 누릴 수 있는 점이 특이했다. 온천장이 형성된 곳에서 뜻밖에 곤돌라도 타보고, 이름도 기억 안나는 곳에서 모래썰매도 타보고, 자주 여행을 다니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경험할 수 있을 만한 것, 해볼 만한 것은 해보고 와서인지 두고두고 꺼내보는 기억이 참으로 많다.

그토록 많은 걸 얻고 좋기만 한 뉴질랜드에서 내가 자주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지루함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반지의 제왕을 이 곳에서 촬영했다), 양을 보고 신기했던 마음이 계속 가다 보면 지겨워지는 마음으로 변할 만큼 끝도없이 이어지는 것, 보트 하나를 타도 재밌는 감정을 넘어 지치는 마음이 들 때까지 태워주는 순박함까지. 게다가 4시면 상점이 문을 닫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당장 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느렸다.


어찌보면 그 단점아닌 단점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착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착하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는 건 사람과도 일맥상통한다. 재미는 없어도 진국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진국인 나라 덕에 나는 너무 바쁘게 사는 게 익숙한 한국 문화에서 좀 비켜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지금 직장생활을 하는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늘 시간의 흐름과 내가 처한 환경을 객관화해서 보려 하고 나이 들어 시간을 역순으로 돌렸을 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준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여러 가지로 당황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국과 다르다고 느끼며 장단점을 비교했던 기억을, 이제는 새롭게 접하는 정보와 발전하는 한국을 다시금 경험하며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살아있는 '순간순간'이 뉴질랜드를 다녀와 얻은 가장 큰 재미고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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