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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Oct 21. 2018

휴직의 시간을 채우는 방식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이끌어내 보다

회사에 나가지 않은지 삼십 여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가 지나도 지금, 회사에 가지 않고 있는 것이 휴직이 아니라 단지 긴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로 출근하지 않은 날로부터 한 달, 즉 삼십일 째가 되는 날이 언제쯤 되는 것인지 하나하나 날을 새어 휴대폰 다이어리에 표시를 해놓았었고 어느새 휴직 같지 않은 날들이 모여 벌써 그 개수를 채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조금 무기력했다. 그래서 어떤 것도 노력을 들여하지 않기로 했다. 가장 먼저 내 몸을 억지로 깨어 있게 하는 커피를 끊었다. 카페인으로 인해 수면 시간을 조절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고 싶을 때 잠들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니 정말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되도록 화장도 하지 않고 새치머리도 그대로 두었다. 외모에 신경쓸 일이 없다는 것 또한 참으로 편하고 좋았다. 게다가 사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약과 화장품을 챙겨 먹고 찾아 쓰며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여 최대한 사용했더니 늘 쌓아둔 물건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써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고 헛헛하던 마음이 조금 채워졌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일상을 단조롭게 돌리기 위한 시간이 흘러 휴직을 한 지 3개월이 되어 간다. 이 정도가 되어서야 조금 실감도 나고 조금 아쉬운 점도 있어 찬찬히 더듬거려보니 이제야 내 시간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약 1년간의 긴 휴직을 미리 꼼꼼히 계획했더라면 지금쯤 굉장히 많은 일을 소화해내고 있을 테지만 특별한 계획도 없이 ‘언젠가’란 미래를 ‘당장 현실로 끌어 쓴 나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굳이 손꼽을 만한 일이라면 아들이 있는 전남 구례를 오가는 장거리 운전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운전 뒤 며칠간의 확실한 휴식이 보장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다. 또한 내 차로 부모님 가게 출퇴근을 시켜드리며 그렇게 싫어하던 운전을 내 인생 가장 많이 하고 있다. 나이 사십에 생각지도 못한 이런 시간은 부모와 자식 사이를 단단히 채우 어릴 적 메우지 못한 육아 빈자리보상받는 것 같아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나의 휴직이 휴직 같지 않다고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유난히 삼시 세끼 먹고사는 일에만 치중한 탓이 크다. 밥하 치우고 고요하게 일과를 보내고, 또 밥해먹고 씻어 정리해 놓는 일.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 하나가 이토록 시간을 잡아먹는 일임을 재확인한다. 육아휴직의 주된 이유인 아들과의 동행을 위해 제주에서 약 한 달여를 보내면서도 그저 하루 밥 세끼 챙겨주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는 이것 하나를 충실하게 살아내기만도 바쁘고 힘들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황금 같은 휴직 기간에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하루 밥 세끼 먹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맞벌이로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치곤 시간적으로 꽤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쇼핑이나 외출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 회사 바로 앞 큰 쇼핑몰이 위치해 있어 평일 저녁에 여유 있는 몰링(malling, 쇼핑몰에서 시간 보내기)도 즐기고 먹고 싶은 것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대부분 먹고 지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주말이면 아이를 보러, 남편을 만나러 구례와 제주를 오가며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았고 KTX와 비행기를 물리도록 타면서 일탈에 대한 로망과 미련도 크게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출장을 다니는 바쁜 일정 속에서 조퇴를 해서라도 틈틈이 마사지도 받고 필라테스와 어학 수업도 들었기에 자기 계발에 대한 욕구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가방이나 화장품에 사치하지 않는 나는 돈을 모아 사야 할 만큼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어 오로지 그때그때 먹는 것과 입고 싶은 것을 최대한 좋을 걸로 사며 어떤 식으로든 욕구불만이나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내가 휴직 후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주는 일 이외에 마음 속에 큰 불만이나 아쉬움, 하고 싶은 일은 크게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하고 싶은 일반적인 갈증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시간이 아주 많이 남는 내게는 아무리 그래도 장기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할 텐데, 자격증이나 스스로의 발전을 증명할 만한 뭔가를 ‘짜잔’하고 멋지게 따놓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아주 가끔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문제어떻게든 해보기만 한다면야 회사를 다니면서도 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렇다면 정말 휴직기간에 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단 하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잘했다 싶은 일로 직업을 바꾸지 않고 평상시의 내 모습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잠깐 동안 타인으로 낯설게 살아보는 일이라고나 할까? 아니 정확히,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매일 가야 하는 것이 아닌 곳에서 또 하나의 나로 살아보고 싶었다. 이전부터 나는 내가 가진 직업 타이틀에 어울리는 사람보다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승무원이 딱 승무원처럼 보이고, 공무원이 너무나 공무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승무원의 서비스 마인드를 한 공무원’ 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직업군이 만나는 시너지 말이다.

올 초 드라마 하나를 푹 빠져 챙겨보았다. 그 드라마에는 ‘정희’라는 인물이 나온다. 가슴 아픈 사랑으로 자신의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하는,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속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가게에서 삶에 찌들어 생활을 위해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술집 같지 않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예쁘게 차려입고 맛있는 음식으로 술 한 잔 기울이며 지인들과 어울리는 그녀의 삶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조금 뜬금없는 일이지만 부모님 가게를 도와드리며 잠시라도 비슷하게 살아보기로 했다. 쉬는 동안 부모님 손도 덜어드리고 용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이왕하는 일, 뭔가 내가 하고 싶던 일을 실현하기로 한 것이다.

회사에 입고 가는 단정하고 정적인 옷이 아닌 그냥 손이 가는 옷, 입고 싶은 옷을 꾸민 듯 안 꾸민 듯 차려입고 예쁜 앞치마 하나를 매고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곱창집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들렸다. 곱창집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중요하진 않지만 원하던 반응이었고 그런 정의를 새로 쓸 수 있는 일이 흥미로웠다. 기존에 오던 손님들은 조금 낯선 나를 새로운 알바인지 며느리인지 궁금해고 딸이라고 밝히면 대부분은 가게를 물려받기 위해 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잠시 고민도 했지만  나는 가게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단기 알바의 그 유한성에 매료된다. 언젠가 그만할 일,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날 붙들어 놓고 싶을 만큼 최선은 다하지만 질리거나 무료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가게를 찾는 여러 인간군상을 접하며 기존의 편견도 깨고, 새로 온 젊은 층 손님으로부터 곱창집 누나, 이모, 언니로 다양하게 불리며 새로운 시선으로 관심을 받는 하루하루가 신선하고 재밌다.

물론 기분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몸을 쓰는 일이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고 기분 전환으로 시작한 일치곤 꽤나 큰 책임감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 입소문을 타며 바빠진 탓에 어떤 날은 숨이 찰 만큼 헉헉대며 손님을 치러내기도 한다. 그 바쁨 덕에 사사로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아 시간이 잘 가서 좋기도 하지만 문득 이 귀중한 시간에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현실 자각 타임이 오기도 한다.

제일 힘든 점은 오랜 시간 붙어 있다 보니 원치 않아도 부모의 소소한 투닥거림을 중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게에 새로운 제안을 내 매출 상승으로 이어진 부분도 있지만 개선안으로 낸 의견이 건방진 도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남이라면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해도 좋을 문제가 가족과 일하려니 일일이 부딪히고 심적으로 버거운 것이다. 육아휴직 후 복직에 회의적이었는데 오히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넘어서는 충성심마저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휴직으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도, 아이에게만 치일 수 있었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어 다행다. 아직 7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지만 한 편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동안은 또 다른 모습을 이끌어 내 타인처럼 살아봤으니 다음은 본래의 나에게 충실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싶다. 억지로 시간을 내어야만 하거나 꼭 낮 시간을 이용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찾아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 한다. 다행히 초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들도 하나씩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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