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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May 28. 2020

워킹맘, 마음을 고쳐먹기로 결심하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학교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시국에!


아이 유치원 봄방학이 길어져도, 코로나로 입학이 연기 되도 당분간은 믿고 맡길 데가 있어 안심이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휴직을 내지 않고도 두 사람 모두 생업을 이어갈 수 있단 것이 감사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부모와 떨어뜨려 놓고 지낼 수는 없고 온라인 개학마저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 이젠 곁에 데리고 있으면서 뭐라도 방안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시골에 좀 더 있겠다는 아이를 인천으로 불러들였다. 40여일 만이었다. 그럼에도 학교등교를 결정하기까지 많은 생각이 오갔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시점에 이대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어떤 경우라도 개학을 강행한다면 당분간 체험학습을 써야겠다는 나름의 궁리도 해두었다. 하지만 개학의 형태가 바뀌고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면서 온라인 개학이란 것은, 맡길 곳만 있으면 되던 때와는 그 결이 조금 달라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도 없게 했다.  


학교에서는 온라인수업 진행과 출결관리 등을 위해 온라인 환경이 갖춰졌는지, 수업에 접속할 스마트 기기는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수요조사를 진행했다. 주변상황은 답답함과 갑작스러움이 교차하며 숨 가쁘게 진행되었지만 나는 마치 딴 세상일마냥 한두 달 더 놀게 해도 되니 그냥 우리를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열흘 데리고 있으며 애착도 만땅으로 회복했으니 다시 구례로 보내 ‘진짜 개학’때까지 지켜볼까, 우왕좌왕하고 정신이 없을 개학 초반 시기를 좀 비켜 가볼까, 관망은 하되 매주 바뀌는 상황에 나름의 대응 안을 내느라 머릿속은 분주했다.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나또한 명확한 답이 서지 않자 저학년의 출결 정도야 가벼이 여기자는 마음이 커졌고 학교가 관리대상에서 우리 아이를 제외시켰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최대 강점으로 꼽는 사립초에 보내면서 이런 마음을 갖는 건 어쩌면 모순인지도 몰랐다. 선생님의 문자에는 최대한 정중하게 맞벌이육아로 인해 온라인 출결이 어려운 상황이라 답을 하고 상황을 살폈다. 그래놓고는 그 많은 고민이 무색하게도 학교를 믿고 보내주시겠냐는 물음 한마디에 그러겠노라고 즉답을 해버리고 말았고 아이의 초1 생활은 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담임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긴급 돌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내심 학비가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넘친다거나 교육에 대단한 뜻이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고 맞벌이를 유지하겠다는 명분 하나로 공립이 아닌 사립학교를 선택했는데 입학금과 1분기 수업비를 납부한 상태에다 교복에 준비물 구입까지 들어간 돈이 한두 푼도 아니었으니 아쉬운 마음이 너무도 큰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올해 한해만 보낼 것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금 손해가 마이너스는 아닐 것이라 판단되어 이번 어려움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학교를 보내고 말고를 결정짓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다. 통학차량을 이용하겠다고 신청해두었기에 원래대로라면 출근 전 학교를 갈 일은 없었지만 이젠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이가 학교를 통학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가게 될 학교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기준으로 (나의)회사 반대편 20분 거리에 있었다. 정식개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쿨버스 운행이 정지된 상황에 과연 아이를 어떻게 학교에 데려다놓느냐는 것이 대단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엄마의 고민과는 별개로 우선 아이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제주에 있는 남편이 연차를 내고 집에 올라와 자차를 이용해 등하교를 해보며 긴급돌봄 적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서너 번 픽업을 해주고 남편이 홀연히 떠난 뒤 나는 아침저녁으로 이 거리를 오가야만 했다. 20분이라는 시간은 네비를 통해 최단 거리를 산정한 시간일 뿐 실제는 이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출퇴근 시간은 가뜩이나 붐비는데 인접해있는 경인고속도로 유입차량으로 차가 기약 없이 막혔으니 나는 아이를 데려다놓고 언제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정확한 소요시간을 산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게다가 덩치 큰 화물차를 상대로 운전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운전을 싫어라하는 엄마는 수행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인천시내 한 바퀴를 돌고 늘 긴장한 상태로 회사를 오가자니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지쳐서 몸살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매일 밤 느끼고 입에 약을 털어 넣으며 버텼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놓았다고 무작정 오래 맡길 수만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등교를 시작을 했으니 탄력근무 이용과 연차를 시간단위로 쪼개 쓰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하루하루 쫄리는 기분으로 잠이 들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리 클리어 해도 지치지도 않고 달겨드는 적들을 눈앞에 둔 게임 속 플레이어가 된 기분이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육아휴직이라도 내야할 판이었다. 워킹맘이 마주한다는 두 번의 고비 중 출산 후 3년 고비는 넘겼으나 결국 초등학교 1학년 고비에는 이렇게 포기하고 들어가야 하는 생각에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그 무렵 격일제 재택근무 전환으로 아이케어가 일부 가능해지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그렇다고 픽업에, 케어에 어느 것 하나 수월해지는 것은 없었다. 자기 자식 먹이고 학교 보내는 일에 왜 이렇게 호들갑인건지, 케어가 안 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맞벌이 가정의 기나긴 하소연에 남들의 시선은 꽤나 냉랭했지만 먹고 사는 일에 쿨해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내 주변 지인들 다들 고만고만한 어려움을 겪으며 이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에도 절망하지 않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 우선은 하루를 살아남아야 스쿨버스를 태우든, 전학을 시키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아무리 부여잡은 손을 꼭 쥐어도 아이 학교 때문에 하루 왕복 50km 정도를 운전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이가 ‘입학식’이라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못하고 발을 들여놓은 낯선 환경에서 주눅 들거나 불편한 경우는 없는지 살피느라 이젠 체력만 고갈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혼모라고 생각하고 살면 돼!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헤어진 뒤 생일선물 쿠폰을 받았으니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남편이 제주에서 혼자 지내는 상황을 꽤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걸’ 어떻게 참고 지내냐는 짖꿎은 질문을 했다. 여기서 ‘그걸’이란 혼자 힘들지 않냐는 의미보다는 남편이 여유 있는 게 꼴 보기 싫지 않냐는 의미가 더 컸다. 질문자는 남자였고 보통 부인들이 자기가 고생하는 것보다 남편이 편한 것을 더 못견뎌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었다. 나라고 왜 아무렇지 않을까, 다만 불평불만을 하기엔 나는 늘 바빴고 그래서 체념한 듯 나도 모르게 미혼모라고 생각하고 살면 된다는 말을 해버렸다. 남편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입장을 들을 겨를도 없이 우린 한바탕 웃고 이 대답은 다른 대화 속에 묻혔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있던 누구 하나 기억 못할 말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그 말은 백프로 농담도, 근거 없이 그냥 나온 말도 아니었다.


아이가 네 살 무렵 그때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부모특강을 진행했었다. 활동 중간에 돌아가며 각자 자기 얘기를 하는 시간이 잠시 주어졌는데 한 엄마는 쉽지 않을 수도 있는 얘기를 아주 담담하게 꺼냈다. 한부모 가정인 자신은 평일에 몸이 아파도 병원도 갈 수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자신만 바라보는 아이가 때론 버겁지만 그래도 지금이 행복하니 최선을 다해서 키울 거라는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발언으로 주변 엄마들은 잠시 숙연해졌다. 어쩐 일인지 그 암담하고 절실한 상황에 깊이 공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마에게서 전해오던 긍정적인 에너지에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그때였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어지간한 일로는 징징대며 살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했던 것이. 그래서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힘들지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코로나 관련 대응과 영상회의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랴, 아이 숨통 트여주겠다고 인적 드문 공원으로 실어 나르랴, 열심히 고른 책을 부지런히도 사다 나르랴, 점심시간도 쪼개 쓰며 살았지만 그래도 나는 아픈데 병원을 못 갈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기대를 접을 만하면 제주에 있는 남편도 찾아와 아이와 놀아주려 애를 쓰니 늘 최악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시간을 쪼개서 살아야 하는 엄마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는 학교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새로 사귄 친구와 놀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거리유지도 잘하고 마스크도 잘 쓰고 지냈다. 학교에 간지 일주일가량 지났을 무렵 하교시키는 차안에서 아이는 학교가 이렇게 좋은 덴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 간 엄마의 모든 노력에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 멋진 노랫말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이 정도 운전거리 쯤이야 회사가 이사 갔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겠다는 정신승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머리로 아무리 똑부러지는 결론을 내리려고 해도 마음은 그걸 부정했다. 지인과 웃으며 말할 수 있었던 작년과는 또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혼자 모든 걸 오롯이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은 농담처럼 넘기기엔 너무나 냉혹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밤 나는 책 내용에 동요되어 흐느껴 울고 말았다. 심적으로 지쳐있고 마음에 병이 들었다는 사실이 무시된 채 그냥 넘어가지질 않았던 것이다.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말없이 일어나 휴지를 가져다준 아들은 나에게 엄마 왜울어, 가 아니라 괜찮아, 라고 말해주었다. 자기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 엄마에게 매달리며 보채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딱 하루만큼의 살아갈 힘만을 얻고 또 무너지기를 반복하던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갔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자신과의 약속을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돌봄 교실에 있던 두 아이는 동시에 하교를 하며 무척이나 신이 나있었다. 마음이 통한 둘은 자연스레 바깥 운동장에서 좀 더 놀고 싶어 했고 나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에 그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얼른 집에 가자고 재촉을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상대방 아이의 엄마는 우리 아이만 좋다면 더 놀게 할 의사를 비쳤다. 나는 당연히 그 아이의 집이 근처일거라 생각을 하고 또 나만 힘들지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질 준비를 했다. 말릴 틈도 없이 운동장으로 달려가 축구를 하는 형들 사이에서 신나는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 친구의 엄마에게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그 아이의 집은 학교주변 동네는커녕 아예 인천지역을 벗어난 곳에 살고 있었다. 심지어 엄마 회사는 서울이었다. 아침에는 아빠가 자차로 등교를 시키고 저녁에는 엄마가 조퇴해서, 그것도 전철로 한 시간 반 걸려 데리러 왔다가 다시 한 시간 반이 걸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이 든다고 아들을 제주도로 데려가 키우라고 남편에게 모진 말을 한 내가 부끄러웠다. 그 엄마는 힘이 들지만 학교선택에 대한 확신과 자신이 감내해야 할 부분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이 상황을 매우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전철역까지 아이 걸음으로 15분은 족히 걸릴 거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없어 둘을 차에 태워 전철역에 내려주었다. 손을 흔드는 두 모자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뜨거운 위로를 받았다.


마음을 고쳐 먹어보려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 엄마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덜 힘들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개학일정이 한 강사의 거짓말로 또다시 연기되었을 땐 모든 의욕이 꺾이고 심통이 하늘까지 솟구쳐 일주일 정도 휴가내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만 싶었지만 마음을 조금 내려놓자 이렇게 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이 상황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존대로라면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회사생활을 이어가야하는 상황이었고 과거의 나는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전날에야 새벽비행기로 돌아오는 출장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위기상황에 모든 걸 감당하고 모든 걸 얻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무급휴가를 신청하고 조심스런 마음에 줄였던 외식을 늘리고 친정엄마 찬스를 쓰며 내려놓기에 들어갔다. 좀 덜 벌고 덜 조급해하며 원망의 마음을 키우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미혼모처럼 산다는 말이 한편으로 남편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우리 부부가 선택한 이 환경 안에서 나름의 역할에 충족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앞날에 불안해하며 하루하루 속 타는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조금 편안하게 맞이하려 한다. 그것이 내 짜증을 받아내느라 눈치 보는 내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니까. 조금 덜어낸 이 마음과 마주한 두 손으로 부디 주변 도움 없이 아이를 돌보는 손길에 따뜻한 위로가 닿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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