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면접이 끝나고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유난히 길어진 본부장님과의 1:1 교육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야구동계프로그램을 마치고 먼저 집에 온 아이가 손짓을 합니다. 엄마에게 무언갈 보여줄 요량입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완성된 '귀멸의 칼날' 굿즈를 보니 반갑고, 고맙고, 결국 끝은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귀멸의 칼날 '시어터' 굿즈는 종이조각을 하나씩 떼어내고, 풀로 붙여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스탠드형 종이작품입니다. 이 굿즈를 작년 크리스마스 때 아들 졸업여행 기념으로 간 일본 여행에서 사 왔습니다. 하루 반나절을 꼬박 들여 겨우 하나 건져온 이 굿즈제작을 아들에게 부탁했는데 한두 개 붙이다 딴 거 하게 되고, 또 며칠 하다 일이 생기고 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 여행 콘셉트는 아들을 위한 여행으로 시작해 엄마를 위한 여행으로 끝난 굉장히 사심 가득한 여행이었습니다. 3일 중 하루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갔고, 하루는 애니메이션 센터를 갔는데 애니메이션 센터를 간 것은 오로지 귀칼 굿즈만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귀칼 굿즈가 전국 품절인 탓에 그곳에서는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서다 주변 돈키호테에서 저 시어터를 겨우 발견한 그렇고 그런 흔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귀칼시리즈 중 한 시즌을 남겨두고 조금 바빠져 시청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귀칼 시청은 단순히 미룬 것이 아니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설레며 기다림으로 남겨둔 일정입니다. 처음 귀칼을 시작할 때 아들의 추천이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이나 거부하고(엄마 귀신얘기 싫어해), 막연히 깍아내리며(그게 뭐가 재밌는건데), 시청하는 것을 강하게 부정(엄마 진짜 바빠!)하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아들은 지치지 않고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꼭 봤으면 좋겠어. 엄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어떤 점이 재밌고, 어떤 점이 좋으며, 뭐가 멋있는지보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아들의 말에 저는 더 이상 귀칼을 거부할 힘을 잃었습니다. 첫 장면을 볼 때 작화에 대한 감탄, 아들이 엄마가 꼭 보길 원했던 장면을 말해주기도 전에 알아차리고 울컥했던 순간, 하나하나 잊히지 않고 저에겐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사이 아들은 제가 잘 보고 있는지 체크만 할 뿐 섣불리 스포를 하지도 않고, 다양한 캐릭터에 제가 혼선을 겪지 않도록 중간중간 옆에서 같이 봐주고 이름들도 정리해 주며, 자기가 추천한 작품을 엄마가 즐겁게 감상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해했습니다.
저는 보험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면접 때 지인영업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고 얼마 전까지도 그 마음은 유효했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받으며 마음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보험은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진 제도인데 그 간의 판매형태와 편견으로 잘못 인식된 부분이 다소 있고 세상에 저만큼이나 보험을 싫어했던 사람도 드물기에 나 같은 사람부터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아들이 만들어준 '시어터' 굿즈를 보면서, 그리고 제가 귀칼을 아들 이상으로 좋아하게 된 사실을 떠올리면서 아들이 제게 해준 모습을 찬찬히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이 없을 수도,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또 시작했지만 이어가는 힘을 잃을 수도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때 아들에게서 배운 태도로 곁에 머물러 주고 싶어졌습니다. 더 이상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인을 지우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거리들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제 지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연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하겠습니다.
"너하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어."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