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인 건가
궁금했습니다. 친구는 극 I 성격으로 먼저 나서거나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성격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영업을 하게 되었을까요. 회사에는 자격이 검증된 설계사에게 기존 설계사를 잃은 고객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DB를 제공해 주는 제도가 있는데 거기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고객이 제 친구의 설명을 듣고 하나씩 보험을 늘리기 시작해 그 가정에서만 10개의 보험을 가입했다고 했습니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혼자 고민하면서도, 심지어 면접에서도 지인판매는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 터였기에 나만 제대로 하면 들어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우선 안심이 되었습니다. 저런 식의 방법이 있다는 건 다른 제도도 꽤나 잘 갖춰져 있겠지,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새로 본 설계사에게 금방 마음을 여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걸려 혹여 마음을 열게 되더라도 10개씩이나 가입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친구는 그런 사람을 'Keyman'이라고 부른다고 했고 그 얘기를 들은 저는 막연히 나도 그런 키맨을 만나게 된다면 행운이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키맨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면접을 보기도 전에 엄마에게 제 이직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남편입니다. 퇴사 후에 제가 하도 이 일을 했다 저 일을 했다 하니 나 이거 시작해! 하면, 어, 시작하는구나!, 그만두면 아, 그만두는구나! 하던 신랑이 유독 이 일만큼은 좀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남편의 머릿속에도 보험 하면 보험아줌마, 비전문가의 지인판매 영업방식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테고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제 성격을 알았기 때문이겠죠.
이해는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하나씩 정보를 흘렸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니 물어 본 만큼 대답했습니다. "미국회사야." "리크루팅에 투자를 많이 한대." "J 있잖아 억대연봉 자야." 그 날밤 저는 카톡으로 문서 하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공부한 명리학과 MBTI를 섞어 만든 사주풀이 프로그램이 있는데 언제 제 걸 넣어 본 건지 남편이 뽑은 커리어 리포트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재능이 '보험 영업'이라는 무대를 만나 '돈'을 버는 형국입니다.
운명인 건가? 물론 다 믿는 건 아니지만 저걸 왜 돌려본 건지 웃기기도 하고 결과에 살짝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을까요 남편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알고 있는 걸 잘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면 신랑은 같은 내용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지치지 않고)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하기까지 하니 지인을 만날 때마다 묻기 시작합니다. 이 회사 알아?
사실 신랑은 제가 이 일을 하게 되어서 저를 소개해주고 싶은 것보다 새로운 인사시스템과 보상체계에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전에 기획인사팀에서도 일을 했고, 잠깐 사업도 해봤고, 지금도 조직을 운영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제 일로써 말할 땐 크게 관심이 없다가 회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관심을 보이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벌써 계약하겠다는 사람을 알아왔습니다. 서로 보험 얘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일 뿐이지 와이프의 이직얘기를 하자 주변에 보험을 정비하거나 종신을 새로 들어야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제가 제일 관심 가는 분야인 법인절세에 대해서도 이미 이해도가 높은 동생이 있어 그 동생도 아는 기업인을 만나면 저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주변은 다 갖춰졌고 이제 저만 잘하면 되는데 시험에 떨어지다니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공부 안 하고 이렇게 글 쓰고, 책 읽고, 청소하고, 놀다 보니 남편이 불안해 보입니다. 신나서 할 일이 생겼는데 갑자기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걸까요. 저에게 설계사 안 할 거냐고 묻습니다. 저를 대신해 영업이라도 뛸 기세로 주변을 맴도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이제 공부를 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Keyman에게서 할 일을 뺏으면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