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로이 Jan 14. 2022

연애일기 1. 가장 최근의 이별 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한 고찰


연애일기 1.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

가장 최근의 이별 후에, '결국은 왜 혼자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고찰하며 적은 글을 뒤늦게 옮겨본다. 냉소주의 함량 약 60%. 비혼주의자의 연애와 관계에 대한 고찰. 우리 모두는 결국 혼자다.


  함께하기로 약속을 하고 함께함을 쉬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쉬이 이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그런 삶은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실천할 수 없는 삶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함께함이란, 오래도록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혹은 사람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의식과 당연한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는 "애인을 잘 만드는 쪽은 오히려 독신주의자들이랍니다."라는 주인공의 대사가 잠깐 나온다.(소설의 주제의식이나 중요한 내용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지나가는 말이다.) 독신주의(지금은 '비혼주의'라고 부르는 삶의 태도)일수록 애인을 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차피 멀리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의 애정과 즐거움으로 애인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가려가며 평생을 함께 살 생각을 하고 만나려고 하면 너무 끔찍해서—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가망이 있었다면 내가 비혼주의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결혼이라는 제도는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 '독신주의자(비혼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결혼은 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개념과 정서적인 개념, 사회적인 활동 그 모든 범위를 포함한다. 정말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와도 함께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다간 손절 할지도 모르는 나 같은 예민하고 혼자의 삶에 일찍이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고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과, 그와 모든 것을 함께하기로 하고 같은 공간에 살며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혹시 이걸 모른 채 서로가 너무 좋아서 덜컥 결혼에 입문했다가 돌싱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아닐까?) 그렇기에 결혼을 염두에 두고 연애를 시작하면 그저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고려해야 할 사항들과 두려움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비혼주의자들은 아예 연애를 하지 않거나 혹은 간간이 연애를 하거나 혹은 자유롭게 연애를 많이 한다. 비혼주의자라고 해서 연애도 안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나도 그렇지만 내 주변에 수많은 비혼주의 여성들이 결혼을 전제하지 않은 연애를 진행 중에 있다. "독신주의자들이 오히려 애인을 잘 만든다"라는 소설 속 통찰력 있는 대사는 정말 맞는 말이다. 결혼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독신주의자들이 '섣불리' 애인을 만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연애를 하기로 마음먹으면, 독신주의자일수록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쉽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지 않고 지금 당장 이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 지금 당장 연애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것만 보고 시작할 수 있으니까.

  같은 비혼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연애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나의 경우에는 20대 동안 길고 짧은 많은 연애를 경험했다.(아무리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긴 기간이든 짧은 기간이든 연애 중에는 애인과는 친밀하게 지내게 되기 때문에 나름의 기준은 항상 있다.) 연애를 취미처럼 해온 경력이 있다. 딱히 내세울 경력도 그렇다고 부끄러운 경력도 아니다. 연애를 하다가 너무 좋은 나머지 결혼까지 생각한 적도, 상대방의 제안으로 진지하게 결혼을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물론 결혼이 성사되기는커녕 장기 연애까지 넘어가지도 못했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모든 연애가 지나고 보면 추억이거나 경험이라고 하지 않는가. 연애에 관해서 나의 경험치는 max에 가깝다.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지만 대체로 괜찮았고 후회로 남은 연애는 없다. 다 경험치니까.  


  연애를 하는 동안은 마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히, 그런 기분으로 살고 싶은 것도 연애의 이유 중 하나이니까. 사랑받는 것 같고, 계속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환영할만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달콤한 기분의 연속이 삶을 충분하게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연애의 끝에 느끼게 되는 감정은(다시 말하자면, 이런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연애가 끝나게 된다.) 어차피 당연하게 나는 결국 혼자이며 상대방에게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존재라는 외로움과 허무함, 나 또한 상대방을 나와 굳게 결속된 존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회의감과 허탈감이다.

  더 어릴 때는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나의 기준치가 너무 높은가? 하고. 세월이 지나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여가면서 명료해진 사실은 나의 기준치는 전혀 높지 않고(조금 까다로운 부분들이 있을 수는 있겠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상을 꿈꾸거나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고 정리해 보았다. 내가 나와 오래도록 연결되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내가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마음이 따뜻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약하고 여린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원한다.

한 계절에 피고 지는 들풀이나 길을 지나는 작은 고양이와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애정하고 보살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약한 존재들 앞에서 한없이 여리고 약하고, 강하고 억압적인 것들 앞에서 강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약한 것 앞에서 강하고 강한 것 앞에서 약한 비겁한 사람은 곁에 두지 않는다.

배려심이 있어 상대방을 무심결에 모욕하거나 무심하게 상처 주는 일이 없고 혹여 실수하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으나 교만하지 않고 함부로 남에게 지식을 전시하지 않으며 언제나 더 배우고자 하고 경청할 줄 아는, 그러나 스스로를 내세워야 할 때에는 주변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자신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웃게 할 수 있는 여유 있고 깊이 있는 사람을 원한다.

배울수록,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고 사람과 지식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스스로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고요해지고 깊어지기에.

스스로를 사랑하고 가꿀 줄 알며, 그렇기에 매력 있는 사람을 원한다. 항상 잘생긴 사람이 좋다고 말하고 다니지만(당연히 잘생긴 사람이 좋다.) 엄청난 장신이나 미남을 바라는 게 아니다.(어차피 없다.)

스스로를 돌볼 줄 알고,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어필할 수 있으면 된다.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하기보다 유튜브나 커뮤니티 따위를 켜서 유명인 혹은 타인의 말을 듣고 그걸 자기 의견으로 정하고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깊게 생각해 보고 지금까지의 삶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치우치지 않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스스로의 의견과 방향을 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어느 유튜버가 아니라, 나무위키가 아니라 '자신이 다양한 방면으로 깊이 있게 사유한 결과의 견해'로 뒷받침해서 조리 있게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할 줄 알고 약자의 분노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으며 유형, 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을 원한다.

연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태도에 배어있으되 단호해야 할 때는 단호한 사람을 원한다.

삶의 순간들을 즐길 줄 알고 여유를 가질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그게 음악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문학이든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다양한 경험과 취향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사람을 원한다.

1인분의 삶을 충분히 살아가며 스스로 의식주를 관리할 줄 아는, 어른으로서의 삶을 일구어가는 사람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바를 정리해보면 이 정도다. 물론 지금껏 연애를 하면서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다.(만났다면 지금까지 만날 수 있었을 수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상적인 인물을 바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나열한 요소들은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할 이에게 내가 인간으로서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성애자인 내가 지금까지 연애 상대로 알아가고 만났던 남자들 중에 내가 나열한 기준들을 모두 만족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그런 경험치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현실에 불가능한 이상(理想)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주변에는 위에서 내가 말한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여성이 당장에 손에 꼽으래도 10명, 20명은 넘게 있다.(내가 이성애자라는 것이 가끔 통탄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기준들이 인간으로서 충족하기에 어려운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딘가에는(내가 아직 못 만났거나 인연이 안되었을 뿐) 저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남성도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따뜻하고 매력적이며 공감능력과 지성을 두루 갖춘 좋은 사람'을 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리고 연애 상대를 고려할 때 자기 관리 여부와 외모가 내 취향인지도 당연히 아주 중요한데, 남자들이 예쁘고 몸매 관리를 하는 여성,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갖춘 여성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하게 여성들도 취향에 맞는 외모와 잘 관리된 몸매를 가진 남성을 선호한다. 물론 여전히 ‘외모보다는 능력'이라던지 '외모보다는 마음'이라는 구호에 빠져있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연애 시장에서 어떻게 외모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상대의 외모를 정말로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성애자 여성들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연애는 당연하게 '성애(性愛)'로 구현되는 것인데, 정신적으로 끌리는 것만큼 외적으로 끌리는 것도 성애에 있어서 중요하다. 지금 나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길게 풀어서 하고 있다.

  지금껏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기준을 낮춰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조건이라던지 미래 전망 따위를 기준 삼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지금껏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위에 나열했던 내가 원하는 기준들 중 적어도 몇 가지라도 만족한다고 판단이 되면, 외모가 내 취향인 동시에 이성적으로 매력이 느껴지면,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특별한 결격 사유(폭력 성향이 있는 것 같다던지, 친하지 않은 사이에 말을 함부로 하고 선을 넘는다던지, 매너가 없다던지, 길에서 히드라처럼 가래침을 컥컥 뱉는 행위를 한다던지, 술 먹고 개가 된다던지, 알고 보니 전과자라던지 등등.)가 발견되지 않으면 일단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것은 만남을 시작할 때 내렸던 나의 판단들에 나의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인한 환상이나 착각이 작용했다는 사실과 혹은 상대가 의도적으로 좋은 면들을 보이려고 노력했으나 끝까지 잘 유지할 수 없는 과장되거나 거짓된 면모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진실이 보이기 시작할 때 연애는 끝이 났다. 이번에도 그럼 그렇지, 하는 기분과 지친 마음과 함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임에도 어떤 하나의 요소가 너무도 저 반대편 극단에 있어서 도저히 만남을 지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예술을 즐길 줄 알고 겸손하며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의견이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거나 특정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동조하는 태도를 띄거나 하는 경우. 만나기 시작한 지 한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런 극단의 면이 드러나면 아주 난감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나의 삶을 조금씩 공유하려던 찰나에 그런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에는 모든 환상과 기대가 와장창 무너져 내리거나 한 순간에 정이 뚝 떨어져서 도저히 관계를 이어갈 수 없거나 했다.

  그동안 내내 나도 믿고 싶었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고, 왜 없겠냐고, 어딘가에는 내가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얼마나 간절히 믿고 싶었던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의 연애와 삶을 좌충우돌 겪고 나서 현재 내린 결론은, 이성애자인 나로서는 위에 나열한 기본적인 요소들을 충족하는 사람을 만나 오래도록 함께하는 일은 아무래도 불가능에 가까우니 포기하고 체념하자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삶에서 뭔가를 이룩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본적으로 영영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내가 나를 언제나 잘 보살피고 다독여야 하는 이유다. 누군가 잠시 곁에 머물지언정 나 스스로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연애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연애를 좋아한다. 좋은 연애를 삶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팍팍한 삶에 즐거움을 더하는 양념이 되어준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아마 나는 연애를 할 것이고 잠시든 혹은 조금 긴 시간이든 누군가와 서로 애정을 주고받으며 함께 시절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내가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없다. 그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나의 삶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많거나 꽉 막힌 사람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냥 남자가 능력 있으면, 사지 멀쩡하고 너 좋아해 주면, 만나. 남자는 그거면 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대체 왜 이성을 만나려고 하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건 남성 일반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런 기준에 맞춰서 내 삶을 평가절하하고 상대방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어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짧은 인생, 한 번뿐인 삶을 훨씬 더 가치 있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이가 들더라도 단순히 외롭다는 이유로 내가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준을 바꾸거나 낮추어 살 생각은 전혀 없다. 괴로운 것보다, 실망으로 점철되고 권태로 낙오되어 그냥저냥 남들처럼 살기를 소망하는 삶보다 가끔 외로운 감정이 스쳐가더라도 충분하고 단단한 나의 삶이 훨씬 더 좋다.

  이제는 헛된 기대를 품지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들을 포기하지도 않은 채로 신중하게 결정하여 사람을 만날 것이다. 반복된 연애의 양상에 지치기도 했고, 아마 오래도록 연애를 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독립적인 존재들이므로, 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삶을 일구어야 한다. 나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들일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제는 절대로 삶의 한 켠을 내어주지 않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