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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다

아무튼, 머리카락

by 김진오

어릴 때부터 머리카락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을 담는 저장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유난히 곱슬이 심한 머리카락을 가졌다. 어머니는 내가 머리를 감을 때 꼭 '트리트먼트'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걸 안 하면 머리가 부스스해져서 감당이 안 돼." 하지만 나는 그 끈적한 트리트먼트가 싫었다. 머리를 감고 나서 물기를 짜내며 "아, 개운하다!"라고 외칠 때가 좋은데, 트리트먼트를 바르고 나면 다시 헹궈야 하니까 기분이 망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는 곱슬머리가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반 강제적으로 짧은 스포츠 스타일 머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게 싫어서 중학생이 되자마자 나는 머리를 기르고 자연스럽게 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매일 아침 드라이를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 습기에 눌려 다시 부스스해지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매직 스트레이트를 해봤다. 처음으로 풀 죽은 내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 너무 낯설어서 그다음 날 다시 짧게 잘라버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렇게까지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는 게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방식으로 머리카락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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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짝사랑하던 선배가 어느 날 머리를 싹둑 자르고 짧은 단발로 나타났을 때, 그를 다시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긴 생머리일 때는 다소 차분하고 조용한 이미지였는데, 단발이 되자 훨씬 밝고 활기찬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카락 하나 바뀌었다고 사람이 달라 보이다니. 그때 처음으로 머리카락이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계속 긴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다가 레지던트가 되면서 관리가 어려워 아주 짧은 머리 스타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관리를 위해 선택한 스타일이었지만, 예상외로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이 스타일이 나한테 어울린다고?' 처음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리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이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카락이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헤어스타일이 달랐다. 귀족과 왕족들은 화려한 가발을 썼고, 일반 서민들은 짧게 깎거나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유지했다. 한편, 삼국시대의 신라에서는 귀족들이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상투를 틀지 못하면 성인이 아니었고, 갓을 쓰지 못하면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경우도 많다. 1960~70년대 한국에서는 장발 단속이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는 불량스럽다는 이유로 경찰들이 길거리에서 머리를 강제로 잘랐다. 반대로, 2000년대 이후에는 짧은 스포츠머리가 군대와 보수적인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젊음을, 때로는 자유를, 때로는 억압을 상징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누구에게나, 머리카락은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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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오래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진 후, 나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흔히들 '이별 후 싹둑 자른 단발'을 클리셰라고 하지만,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였다.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 마치 어제의 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사라지고, 오늘의 내가 새롭게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른 후, 나는 한동안 머리를 자꾸 만지며 거울을 봤다.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변화가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새로운 머리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깨달았다. 결국, 머리카락은 우리의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걸.


결국 머리카락은 그저 머리카락이 아니다.

우리의 감정을 담고, 삶의 변화를 반영하며, 사회적 의미를 품고 있다. 머리카락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변화를 시도하며, 때로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하는 일이 ‘머리카락’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단순히 모발이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돕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머리카락을 심고,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할 수밖에 없다.

머리카락은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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