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머리카락
진료실 문이 열리며 한 커플이 들어왔다. 남자친구가 모발이식 진료를 받으러 왔고, 여자친구는 보호자처럼 그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진료 중 내가 디자인해 준 라인을 보면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묻는다. "여보, 이 디자인 어떻게 생각해?" 순간 나는 멈칫했다. 여보? 아직 결혼했다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이들이 부부인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아니었다. 미혼, 연애 중.
‘여보’라는 단어가 내 귀에 박히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단어, 난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어쩐지 올드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오히려 결혼 20년 차인 내가 '여보'란 말을 들으면 흠칫 놀라고 만다. 아내가 가끔 장난처럼 "여보~"라고 부르면, 나는 반사적으로 "오빠라고 불러"라고 반격한다. 언제까지 ‘오빠’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중년에 접어든 지금, 내가 오빠로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뿐이니,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내를 이름으로 부른다. '혜진아'라고. 이름 뒤에 친근한 어조를 얹어 부르는 그 말에 애정이 담기는 것 같아서 좋다. 아이 이름을 붙여서 "동식이 아빠", "지연이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호칭은 마치 내가 ‘아빠’라는 역할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어색하고 불편하다. 나는 한 사람의 남편이기 이전에, 아이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로 남고 싶다.
아내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는 직함으로, 집에서는 '엄마'로, 동네에서는 '아줌마'로 불리니 이름으로 불릴 일이 점점 줄어든다고. 그래서일까, 이름으로 불릴 때만 유일하게 ‘나’로 존재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우리 집안도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다. 보통은 '삼촌', '이모'라고만 부르지만, 우리 집은 항상 이름을 붙여 불렀다. '영철 삼촌', '숙이 이모', '철수 할아버지', '영희 할머니' 식으로.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머니가 만든 가족 문화였던 것 같다. 당시엔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실용적인 문화였다. 이름을 붙여 부르는 습관 덕분에 이모, 삼촌은 물론, 여섯 명의 이모부와 세명의 고모부, 세명의 숙모의 이름까지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단지 ‘이모’가 아니라 ‘숙이 이모’라고 이름을 붙여서 부르면, 그 사람의 성격, 말투, 좋아하는 음식까지도 함께 떠오른다. 이름은 그렇게 사람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날의 커플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처음엔 ‘여보’라는 호칭이 낯설고 촌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들의 눈빛은 진지하고 따뜻했다. 그렇다. 젊을 때의 사랑은 다채롭다. 여보, 자기야, 여봉봉... 어떤 말이든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애정의 밀도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는 연애할 때 조금은 닭살 돋는 애칭들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입에 담기 민망해서 손이 오그라들고 이불킥까지 할 정도지만, 사실 마음 한편에는 추억으로 잘 남아있다.
진료가 끝나고 커플이 나가면서 남자가 말했다. "여보, 고마워. 같이 와줘서." 여자친구는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 말, 그 호칭은 나는 참 싫어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언어일 수도 있겠구나.
결국 중요한 건 호칭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아내에게 "오빠라고 불러줘"라고 말할 것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리고 나는 계속 아내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게 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