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다시 나는 책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밥 베인이 쓴 '빅 히스토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지원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핵심 강의를 정리한 건데,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고고학, 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합해 우주 빅뱅에서부터 미래까지 한 권의 책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구의 '빅 히스토리'에 비하면 '찰나(刹那)'라는 말도 과분한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생을 사는 내가 '지금'이라는 이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짐작하기도 힘든 그 영구한 역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만으로 정말 아찔함을 느낍니다. 이대로 티끌보다 못하게 사라질 것인가 작지만 뭔가 세상에 남길 기여를 할 것인가 결정하고 싶어지죠. 그런 마음이 들면 비로소 나는 인연 닿는 책을 꺼내 읽거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한 지식, 정보 몇 줄을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니 독서를 그런 하찮은 행위로 격하시켜선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독서란 앞서 잠깐 언급한 '빅 히스토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사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 일입이다. 긍지를 가져도 좋을 일입니다.
고대 사회에선 글을 주로 점토판에 새겼고, 오늘날 서양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의 먼 조상 격인 쐐기 문자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근동 지방에서 발명됐습니다. 당시 발명된 문자의 주된 용도는 기록이었습니다. 곡물의 매매나 토지의 거래, 한 왕조의 승전이나 승려들이 제정한 율령, 별들의 위치, 신께 올리는 기도문 등을 남기기 위함이었죠. 이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점토판을 비롯 돌, 밀랍에 새기거나, 나무껍질, 가죽 등을 날카로운 연장으로 긁는 등 재료에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기록을 해왔습니다. 물론 안료를 써서 대나무 쪽이나 파피루스 잎, 비단에 글씨를 쓰기도 했죠.
아쉬운 건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했으니 기록된 정보를 많이 만들어 누구나 소유할 수 없었단 점입니다. 그러니까 비석과 같은 거대한 기념물에 새겨지지 않는 이상 저작물이란 건 특정 소수들만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세기에서 6세기 사이 중국에서 종이와 먹이 처음으로 발명됩니다. 이로 인해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먹물을 묻힌 다음 종이에 눌러 책을 찍는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죠. 비로소 저작물이 필요한 수만큼 복제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대중적 시대가 열린 겁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런 중국의 목판 인쇄술은 인근 국가와 유럽에 급속히 전파됩니다. 그러다 인근 국가 고려에서 1234년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유럽에서도 1450년경 발견인지 발명인지 모를 일이 일어나면서 유럽 전체를 통틀어 겨우 수만 권에 불과했던 책은 격변기를 맞아 폭발하게 됩니다. 과거엔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써야 했기에 금속활자 발명 이전의 책은 현재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소장한 장서량의 10분 1에도 못 미쳤죠. 하지만 활자가 발명되고 50년이 지난 1500년 경에는 약 1000만 권의 책을 갖게 됐습니다.
인류에게 있어 기적은 이때부터 일어납니다. 일단 글자만 알면 누구나 필요한 지식을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된 겁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생기게 된 거죠. 이후 책을 만드는 대량 인쇄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교육에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인류는 경이적인 일들을 해냅니다.
작금의 시대에는 식사 한 끼 비용으로 로마 제국의 흥망, 종의 기원과 꿈의 해석 등 철학, 실용, 과학기술 등의 모든 사물의 본질과 진실, 미래에 대해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책을 구입해 즐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책으로부터 촉발된 과학 기술의 발달로 메모리 반도체라는 경이로운 기록물 저장 매체까지 발명하죠.
텍스트로 환산했을 때 1메가 바이트(1MB) 용량에는 500쪽 분량의 책 한 권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1기가 바이트(1GB)는 모두 1024MB이므로 모두 512,000쪽 분량의 책, 1024권의 책 내용을 기록 저장할 수 있는 셈입니다. IT 시장 조사기관인 IDC는 최근 한 해 동안 인류가 만들어낸 디지털 정보의 총량이 161엑사 바이트(ExaByte)로 추산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양이냐 하면, 앞서 말씀드린 1기가 바이트의 10억 배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MP3로 녹음한다고 가정했을 때 유사 이래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나눈 대화를 담을 수 있는 양이 바로 1엑사 바이트(1EB)라고 하니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것도 사실 모두 책인 셈이니 책은 만물의 씨앗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제 생각부터 말을 해야겠습니다. 독서에 있어서의 가치는 몇 권을 읽었느냐보다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달렸다는 생각입니다. 삶의 가치도 마찬가지겠죠. 그간 인류가 발간한 책과 디지털 정보화로 기록된 정보의 량은 그 엄청나다는 유전자가 갖는 정보의 약 1만 배, 두뇌 정보의 약 10배에 이르는 엄청난 양입니다. 방대한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사람은 겨우 1주일에 책 1권씩 읽는다고 가정할 때 평생 수 천권의 책밖엔 읽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현대 도서관이 소장한 장서의 1000분의 1, 디지털 정보 한 해 생산량의 100만 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양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건립된지도 벌써 2,3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인류사에 책이란 것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 문자 기록물이 없었다면 지난 23세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100년을 4세대로 친다면 23세기는 거의 100세대에 해당하는 긴 시간입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며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만 됐다면, 우린 과거에서 지금처럼 더 진보되진 못했을 겁니다. 선대가 알아냈던 지식들 중 어쩌다 얻어들은 몇 가지 정보만 이야기들로 후대에 전해졌겠죠. 비록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의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었을 테지만.
이런 면에서 책은 인류의 지금을 있게 한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줘 조상의 지혜를 오늘 우리 앞에 가져다주기까지 합니다. 이건 비단 시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거리, 인종, 상황 등을 뛰어넘어 그들이 얻은 깨달음을 책으로, 또 소셜 네트워크 매체의 콘텐츠로 우린 전달받고 습득합니다. 그렇게 인류가 이룩하는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의 세계는 현세에 재림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류가 만들었고, 만들어가는 위대한 여정에 합류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