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에 쏘인 아픔으로 다시 한번 소중해지는 아침

더 늦기 전에 다시 나는 책

by 인생 해 캡틴 하루

얼마 전 나는 미국 최초 불교계 호스피스인 "메타 인스트튜트"를 창립하고, 30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한 불교 수행자 프랭크 오스타세스키의 출간 책 "다섯 개의 초대장"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책은 수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며 알게 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죠. 저자는 말합니다. 죽음, 삶에서 멀리 있는 듯하지만, 실은 생각보다 우리 삶 아주 가까이 있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매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 죽음이 함께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고.


죽음과 관련해 우린 아주 다른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리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나서 매 순간, 삶을 환영하고, 부딪히면서 평온한 마음을 만들어 열린 상태를 유지해 사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항시 두려워하며,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쫓기고, 삶을 비관하면서 우리의 삶을 매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같은 죽음이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자는 행복을 주지만, 후자는 고통을 주게 되죠.


그리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정말 우리 곁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얼마 전 소중한 이로부터 깨달았습니다. 저의 글을 오래 읽어 온 분들이라면, 한두 번 들어 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마른하늘 젖은 소나기 날벼락처럼 갑자기 좋아하던 형이 제대로 된 이별의 말도 없이 싸늘한 주검이 됐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만두 만들던 형은 허리가 너무 아파 어렵게 꾸려가던 만두 가게를 좀 쉬고 물리치료를 받고 오마 제게 전화했습니다. 다시 가게 문을 열면 겨울 장사를 준비해야 한다 그때 메뉴를 새롭게 구성하고 싶으니 그때 좀 도와달라는 말이었죠. 나는 그러마 했고, 그게 형과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조금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걸,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줄걸, 그렇게 허리 물리치료를 받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딱 한 달 만에 나는 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의 소식은 나중에 형수에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디스크인 것 같아 물리 치료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2주가 넘도록 나으란 허리 통증은 낫지 않고, 쉬면서 잘 먹는데도 살이 심하게 빠져 '아차' 싶어 큰 병원을 찾게 됐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간암 말기. 더 허무한 건 그렇게 진단을 받고 열흘 만에, 오전에도 딸아이와 치료 열심히 한 번 받아보자 웃고 나서는 순식간에 혼수상태로 빠졌고,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마땅한 이별 의식도 없이 그렇게 황망히 떠났습니다.


한 달이 갓 넘었고, 형이 먼저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왜 그날 뜬금없이 먼저 형에게 연락이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은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음 날 점심 주방 바쁜 시간을 피해 걸어야겠다 벌써 가게 문을 열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형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시간이라곤 전혀 상상을 못했죠. 다음 날 바쁜 시간을 피해 또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 번의 신호음, 수화기 너머로 형의 목소리가 아닌 형수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알았습니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걸, 직감으로 알겠더군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에 경황없이 장례식을 준비하던 형수가 화장터로 향하던 영구차 안에서 형의 전화를 받은 덕분에 나는 그나마 형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목련공원으로 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화장터로 가는 내내, 영안실 그의 영정 앞에서,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내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오열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야속함을 욕했습니다.


이후 저도 참 오랫동안 아팠습니다. 개인 파산 이후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공황장애가 다시 도졌고, 샤워를 하며 눈을 감는 것조차 두려워서 할 수 없었습니다. 가까웠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그 죽음이란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길을 걷다가도 저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내 죽음이 기다릴 것만 같은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죽음에 관한 온갖 상념들은 도미노처럼 자꾸 더 큰 일상을 하나씩 무너뜨려 갔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내 일상을 무자비하게 먹어 치웠습니다. 나의 하루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버거웠습니다.


내가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고통을 종식시킨 건 아이러니하게도 형의 묘지 비석 옆에 앉아 펼친 책이었습니다. 무심코 형에게 읽어주고 싶었던 책의 한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삶은 온전한 너의 자유다. 네 인생의 주관자는 바로 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부질없는 넋 잃지 말고, 네 삶의 저울추를 이제 죽음에서 온전한 삶이 갖는 가치로 옮겨봐라." 충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성현(聖賢)까지 되려는 것은 어리석다. 그걸 알기 위해 굳이 삶이 끝나는 지점까지 가려는 건가? 그 이유가 뭔가? 지금을 살아라. 주어진 지금에 감사하며, 한 시도 허투루 쓰지 말고 충심을 다해 네 인생을 살아라. 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성현(聖賢)들도 결국 종국(終局)에 깨달은 것은 '지금'이란 시간이 소중함이다."


죽음의 실체를 부정하란 말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찰나, 우리 일상의 매 순간순간, 마치 삶의 동반자처럼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머무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린 평범한 일상에서 저 다음 길모퉁이를 돌아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기서 매번 도망치려고만 한다면 '지금'이란 시간은 거기에 자꾸 쓰일 겁니다.


저는 가끔 '지금'이란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싶을 때, 911과 대구 지하철 참사 관련 영상을 찾아서 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그들이 자신의 예견된 죽음 앞에서, 주어진 '지금'이란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깨닫도록 해줍니다. 남은 온 힘을 짜내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보내고 아파할 사람에게, 내가 사랑했었고, 그동안 고마웠고, 언젠가 우리 다시 꼭 만나자는 말들을 쏟아 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가온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구석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떨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어제 저는 지인들과의 저녁 식사에 갔다가 주차도중 오른쪽 손을 벌에 쏘였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나오다 벽을 넘어온 장미 넝쿨 가시에 찔렸나 싶었는데, 손을 타고 저려오는 통증이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순간 들더군요. 아니다 다를까 가시가 아니라 벌에 쏘인 겁니다. 자리를 피해 조금 거리를 두고 살피니 장미 넝쿨 조금 큰 잎새 아래 말벌같이 생긴 검은색 벌이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차 문을 열면서 그 벌집을 건드린 거죠.


병원이 문 닫았을 시간이고, 그렇다고 응급실은 과하다 싶어 약국에서 사 온 바르는 연고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벌에 쏘인 오른쪽 손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손에 열이 나고, 욱신거리며 아프네요. 결국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지어온 약을 먹은 뒤에 조금씩 가라앉고 있지만 며칠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저녁을 먹으러 가 주차를 하다 벌에 쏘일 거란 상상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란 시간은 매 순간 '죽음'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에게 가치 있어진다고. 막상 닥쳐서 전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보내면 아파할 사람에게, 내가 사랑한다, 보고 싶다, 고맙다는 말을 전합시다. '지금'을 허투루 쓰지 말고,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내가 지금 헛되이 보내는 이 하루, 순간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간절했던 하루였으며,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금'을 이제 '죽음'이란 전당포에서 여러분이 직접 찾아올 시간입니다. 벌에 쏘인 아픔으로 다시 한번 소중해지는 새벽,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