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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honeymind Aug 01. 2021

낭만에 취하고 싶은 날




낭만 [ Roman ]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오늘은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던 7월 마지막 토요일.


오전부터 필라테스 세션과 제일 좋아하는 커피숍에 들려 산 아이스라테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 운동 후 개운하게 샤워 후 먹는 직접 만든 치킨 페스토 파스타는 왜 그렇게 맛있는지. 한점도 남김없이 비우고서는 클로짓에서 요즘 가장 즐겨 입는 카키색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캐드미움레드색으로 매니큐어도 칠하고, 코랄톤 팔레트로 눈 화장도 해주고, 일을 나갈 때는 잘 바르지 않은 바디로션도 바르고서는--다달이 주문한 Architectural Digest 매거진에서 나눠준 에코 백안에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책을 챙겼다. 에어 팟을 귀에 꼽고 글렌 굴드(Glenn Gould)가 연주하는 바흐 곡 Goldberg Variation을 틀고서는 맨해튼에서 가장 매력적인 프렌치카페(적어도 나에게만큼은)로 향했다.


나는 이 프렌치카페의 얼그레이 마카롱을 참 좋아하는데, 여기 것은 한 입 깨물자마자 시원한 얼그레이 향과 쫀득한 촉감이 바로 혀를 감싼다. 카페 안에는 빈티지스러운 자주색 벨벳 소파, 오래된 나무목재가구들과 함께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작품들이 몇 개 걸려있는데, 마치 유럽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연상시켜 준다. 아이스라테를 즐겨 시키지만 아침에 섭취한 카페인 탓 오늘은 민트맛 에비앙 탄산수로 대신하고 마카롱은 두 개 정도 골랐다. 그리고선 좀 들 어수선한 카페 안 코너 쪽의 작은 테이블 하나를 택했다.


첫 장부터 ‘낭만주의'라는 단어로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알랭 드 보통의 단어 선택. 그의 필체는 마치 무라카미 필체처럼 그림을 그리듯 아주 자세히 모든 것을 묘사한다. 여주인공 피부의 창백함 정도, 그녀가 서있는 장소에 바람이 어느 정도 부는지까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의 글은 소용돌이처럼 나를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캐릭터마다 독특한 취향과 각각 다른 아이덴티티를 묘사하는 것, 특히 정신분석적 렌즈로 어린 시절 애착관계가 나중의 연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표현한 것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면서도, 지극히 낭만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마음에 든다. 그렇게 그의 글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적시고 감수성을 자극한다.


오늘 읽었던 부분에서는 책의 주인공들인 라비와 커스틴의 연애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들이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연애초 이야기 중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한편, 사랑은 약점에 관한 것, 상대방의 허약함과 슬픔에 감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약점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시기에(즉, 주로 초기에) 그렇다. 연인이 위기에 빠져 낙담하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우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지만 격원할 만큼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망연자실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지지자라는 새 역할을 부여받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덜 부끄러워하게 되고 아픈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의 말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까워지는 것은 서로의 방어벽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 속에는 서로의 진실된 모습들을 공유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신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들의 사랑은 더욱 진실되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약점에 관한 것', 그리고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게 된다'라는 표현들을 보며 알렝드 보통은 연인 간의 친밀함(Intimacy)을 어찌 저런 완벽스럽게 표현할까 생각하며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의 글은 어느때와 같이 굉장히 분석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게 그의 글에 푹 빠져 몇 시간을 보냈더니 벌써 카페가 닫을 시간이 되었고 나는 그냥 나가기 아쉬워 카페 안에 걸린 그림들을 다시 한번 쭈욱 훑어보고서는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나의 머릿속은 여러 공상들과 생각들로 가득 찼다. 책을 읽다 보면 참 재밌는 게, 캐릭터들의 이야기 속 비슷했던 나의 지난 이야기들이 떠올라 달콤 쌉싸름해지기도 하고, 작가가 말하는 여러 사상과 정의들을 나의 삶에 비추어 보게 되기도 한다. 또 나는 책 속에 나오는 흔하지 않은 도시 이름, 음식재료, 그들이 듣는 음악의 제목 등을 꼭 나중에 다시 찾아보는데, 그 몇 개의 단어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상당히 짜릿하다.


나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나만의 낭만'. 그것은 치이는 일상 그리고 힘든 시간 속 나의 마음과 머릿속을 아주 부드럽게 녹여준다. 아마도 나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그 모든 것들로 채워 넣은 ‘낭만적인 시간을 직접 나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낭만에 취하고 싶던 날, 나의 하루를 글로 되짚으며 낭만스럽게 마무리해본다.

 



맨해튼 센트랄파크에서 도보 10분 정도에 위치한 매력적인 프렌치 카페 'Le Bilboq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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