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더 깊은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
이제 곧 떠난다는 사무실에서 만난 내또래 여자의 안내를 받으며 옷들이 꽉꽉 눌러담긴 커다란 여행가방과 자잘한 가방들을 몇 개 더 이고지고 앞으로 생활하기로 한 아파트의 현관문 앞에 섰다. 문을 열기 바로 전, 안에서 한바탕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자마자 거실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티비를 보고 과자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이 곳으로 안내해준, 곧 떠난다는 여자애에게 집중하며 그녀가 떠나서 너무 아쉽고 섭섭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앞으로 새로 살게되었다고 어색한 인사를 대충 하고 머쓱하게 내가 머물게 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조금, 서러웠다.
그리 크지 않은 평수에 방 세 개, 거실, 키친, 화장실이 있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내가 머물게 된 방은 마스터룸이라 화장실이 방 안에 붙어 있고 나 포함 여자 넷이서 사용한다고 했다. 이층침대 두 개가 기역자로 놓여있었으며 그 옆으로 조그마한 책상이 하나 있었다. 여자 넷이서 함께 쓰는 방치고는 정말 작았고, 방문 바로 뒤 건조대에는 크고작은 빨래들이 널어져 있었다. 붙박이장 한켠이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이었고, 여행가방 하나가 간신히 딱맞게 들어가고 다른 여분의 자리가 없어 그 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옷은 가방에서 빼지 않고 가방이 곧 옷장인양 사용했었다. 두 개의 이층침대 중 창가 쪽에 가까운 침대의 이층을 내가 쓰게 된다고 했다. 선택권은 없었다. 이층침대들 중 아래층은 좀더 이 곳에 오래 머문 사람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쓰는 일명 '방짱' 자리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후에 룸메이트 멤버에 변화가 있어 일층으로 내려갈 기회가 있기도 했지만 나는 계속 처음 그자리를 썼다. 창가라 밤에는 제법 찬 바람이 스미고 들어오기도 했고, 처음 몇주는 내 바로 밑에서 자는 언니가 잠귀가 밝고 예민해서 조용조용히 자느라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언니가 나가고 동갑내기 친구가 들어온 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고 왠지 이층의 내 자리가 나름의 낭만이 있는 자리로 느껴졌기에 굳이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자려고 누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종종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천장을 가까이 맞대고 자 볼 수 있을까, 하고. 그 기분이 나는 참 좋았다.
룸메이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일층 한자리가 비어있었는데, 그자리엔 일본인 친구가 산다고 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나는 그전까지 일본인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역사시간에 배워온 그 일본이 전부라서 만나기도 전부터 괜히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일본, 일본이라..일본인이라니... 이러면서. 친해질수 있을까 해보며. 그리고 그렇게
내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인연인 마이(Mai)를 만나게 되었다.
마이는 한눈에 보아도 일본인임을 알 수 있는 외모였다. 옷매무새며 얼굴 생김새며 모든것이. 나보다는 한살이 많다고 했고,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 여럿이 있는 것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중시하는 듯한 사람으로 보여 앞으로 아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진 않아보였다. 보통은 일이 끝나고 느즈막히 집에 와선 조용히 노트북을 하다가 잔다거나 혼자 늦은 저녁을 해먹는다거나 하는 그녀였고, 다함께 돕고 먹고 어울리는 품앗이가 익숙한 한국인인 우리들과는 다른 점이 분명히 보여서, 처음에는 그리 크게 친해질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관계였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않으며 무난한 성격이라 그런대로 같이 살만한 룸메이트 딱 그정도였달까.
어느 날,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차이나타운 마켓에 아침 장을 보러갈건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온 그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물어와 온게 신기하고 마침 나도 차이나타운 마켓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기 때문에 흔쾌히 함께 가겠다고 했다. 주말, 따스한 아침햇살을 맞으며 다운타운을 걸어내려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장을 보며 믿을 수 없이 싼 가격에 기뻐하고,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햇살에 반짝이는 바닷물과 잔잔히 떠있는 요트들을 바라보며 달링하버 산책도 하고, 브런치도 함께 먹고.
그리고 그렇게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어떤 사람은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대하기가 어렵거나 어딘지모르게 막혀있는 듯한 마음이 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제 막 알기 시작했음에도 온전히 나를 내어줄 수 있을것만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애를 써야 이어지는 인연이 있고, 애를 쓰지 않아도 굳이 자주 연락하지 않더라도 서로에게 서로가 진하게 남아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인연도 있다.
나에게 그녀는 그런 인연 중 하나이고, 그녀에게 내가 그런 인연 중 하나임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징어짬뽕면을 좋아하던 그녀와 야밤에 소곤소곤 끓여먹던 오징어짬뽕, 나란히 엎드려 그때는 꽤 심각해서 밤새 결론없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한국에 일본에 두고온 가족들 이야기, 마이 부모님이 시드니로 여행오신다기에 인사만큼은 일본어로 해드리고 싶어서 마이에게 배웠던 짤막한 인삿말, 꾸벅꾸벅 서로 조느라 무슨 말을 서로 하는지도 기억에 없다 그대로 엎어져 잠들었던 시간들.
이런 추억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지 않나.
내가 시드니를 떠나게 되었을 때, 새벽 비행기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는 밤사이 적었을 쪽지를 건네며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함께 포옹을 하고 아쉬운 이별을 하고.
브리즈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그녀가 준 쪽지를 비로소 열어본 나는 울었고.
우리는 그로부터 몇 달 후 시드니에서 다시 만났고 여전한 시간을 짧게 보내고 헤어졌다. 그때는 둘다 울지 않았다.
수 년이 지난 후, 캐나다에서 남미로 여행을 가던 그녀가 엘에이에 하룻동안 경유로 머무르게 되면서 만나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알겠던 그녀와 나는 만나자마자 부둥켜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곤 깔깔대며 저녁을 먹었다. 4개월이 된 나의 아가와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덩치큰 남자와도 함께.
시간이 흘러도 추억은 바래지지 않았다,
힘주지 않아도 힘있는 인연이 있듯이.
내가 시드니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삼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마이도 좋았고, 함께 했던 나의 룸메이트들, 옆방 오빠들 모두모두 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그렇게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생활패턴도 제각각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었는지, 가족처럼.
너무나 정겹고 흥겨웠던 시간들이다.
외로움을 서로 나누고 다독였던 시간들.
서로의 생활습관들을 이해하고 다른 성격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이해하던 시간들.
외국인과만 문화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라에서 나고자란 사람들끼리도 얼마든지 문화차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간들이었다. 나와 다른 것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득하는 시간들이었고, 아울러 내가 얼마나 깊은 우물 속에서 살고있는 개구리였는지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하게 된 시간들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시간들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전까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가 깨지기 시작했으니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드니에서의 하루하루들은 모두다 일기로 남았다. 그저 그렇고 그런 정말 평범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 일기에는 오늘은 무슨 장을 봤고, 오페라하우스에 누구와 혹은 혼자서 다녀왔고, 달링하버를 거닐었다거나, 너무나 아름다워서 첫눈에 숨이 멎을 것같은 감동을 느꼈던 보타닉가든에서 꽃들도 보고 거대한 황금박쥐들을 봤다거나 하는. 맥도날드에 갔는데 콜라리필을 안해주더라, 직원이 자기 일하는 시간 끝났다고 줄이 그렇게 긴대도 그냥 가버리더라 등등의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가득찼던 일기들. 그 별거 아녔던 이야기들이 참 별거로 다가오는 지금, 그 날 이후의 순간들.
호주는 크리스마스 시즌 2주간은 방학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2주가 내게 주어졌는데,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나에게는 이 예기치 못한 상황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2주에 한번씩 렌트비로 호주돈 250불씩을 내고 있었고, 그 외 생활비로 얼마간의 비용이 꾸준히 나가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돈의 여유가 줄어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드니에서 가족같이 가까워진 친구들과 함께 있고싶은 마음이 크면서도 어서빨리 일을 구해서 생활비를 벌고 여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도 커져갔다. 그러나, 내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약속했던 업체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 2주간은 인터뷰가 아예 없는데다 요즘 그리 인터뷰가 잘 나오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포지션으로 가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조금더 기다려 보라고, 너보다 먼저 온 사람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 먼저 가야 하지 않겠냐고.
Beggars can't be choosers.
점점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마음만은 한없이 바빴던 시간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라서 행복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 해의 마지막날이 다가왔고.
새해가 다가온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밤새 집 거실에서 다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맥주와 콜라, 호떡, 그리고 오징어짬뽕을 다함께 나눠먹으며.
세상이 이토록 넓었다.
한국은 추워서 옷을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한다는데 이곳엔 따스한 여름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비키니를 입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하루를 마치는 늦은 저녁이면 국제전화카드를 들고 나가 공중전화박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도 가까워서 한국이, 우리집이 바로 옆 골목만 꺾으면 고개를 내밀고 그 존재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바다 건너, 계절이 정반대인 곳에 내가 떨어져 나와 있다는 것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상이 이토록 넓었다. 넓었었다.
그걸 이제야 비로소 온 피부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좁았으나 좁은 줄 몰랐던 내 안에 점점 더 큰 세상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마음이 닮은 그대에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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