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나, 고장나기로 결심하다
호주에는 팔개월 정도 있었다. 단 하루도 그냥 흘려보낸 적 없는, 하루하루가 반짝이고 새롭게 빛나던 맑은 별빛같은 시간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도 만나고, 나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도 만났다.
이런 세상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그동안 나는 얼마나 작은 우물 속에 홀로 앉아 거기서 보이는 세상만을 보고 상상하며 그 틀에 머물러 있었나.
세상은 딱 아는만큼 보이게 된다는 것을 이 때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 불안한 계절에 결심했던 호주에서의 푸르게 선명한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 본다.
뒤늦은 질풍노도를 보내던 나를 끝없이 독려하고 달래던 시간들.
'고작' 나 라는 내가 만든 우물에서 벗어나 보자고 마음먹었던 '나'의 계절을 담는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는 우물밖으로 나갈 것이므로.
스물넷 늦가을, 생일을 일주일쯤 앞둔 시점에
나는 여권을 챙기고 여러 짐들을 챙겨 넣고 있었다.
연초부터 차분히 모아온 돈으로 호주에 가는데 드는 비용과 가서 두어달쯤 일없이도 살 최소한의 생활비를 마련한 중이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호주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게 지난 봄, 아빠는 너 하고픈대로 하라 하셨고, 엄마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리셨으나 나는 꿋꿋이 나의 계획과 진행상황을 전해왔다. 이미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가야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나가려는 나의 계획이 사실은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그 때 부모님은 알지 못하고 계셨다. 나는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단 한번도 부모님의 말씀을 크게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나보다 엄마를 먼저 생각해 왔다. 이제는 부모님이 내게 귀기울여 주실 차례였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당시 나에게 몇백만원은 꽤 큰 돈이었다. 호주에 혼자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가려고 이것저것 알아보니, 호텔인턴쉽을 알아봐 준다는 업체가 있었고 그런 업체를 통해서 가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는 면할 수 있다고 들었다. 몇 번 가서 상담을 받았고, 그들의 친절한 계획에 나를 얹으려면 최소한으로 내야하는 비용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지불한 돈이 몇백만원이었고, 그것은 나의 첫 제대로 된 "코묻은 돈"이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부모님이 별다른 말씀 없이 호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마련해 주셨다. 부모님이 내게 귀기울여 주신다는,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긴 말 없이 담백한 한 방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표는 내가 마련하겠노라,
씨익 웃어보이는 것으로 부모님의 조용한 응원이 담긴 한 방에 방 안 옷장 속을 비워내던 내 마음이 노곤노곤해 졌었다.
막상 가려고 하니 심장이 요동을 쳤다.
'호주' 라는 나라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영어권 국가이고,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워킹비자를 받는게 수월한 편이고, 영국식 영어에 더 가깝고, 자연이 아름답다 정도 알았달까. 사촌고모네가 퍼스에 이민을 가 계시긴 했지만, 이미 꽤 오래 전에 이민을 가셨고, 그 이후 딱히 따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진 않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내게 다정했던 고모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갑자기 호주에 가고 싶어졌다고 해서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어권의 나라로 가고 싶었고 그러자면 '미국'도 또다른 옵션이었다. 아빠의 오랜 절친이자 엄마의 큰오빠인, 내겐 세상 다정하고 편한 큰삼촌댁이 계신 미국으로 몇 달 경험삼아 여행삼아 가서 머물다 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돈도 훨씬 절약될 거고 나도 좀더 몸도 마음도 편하게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결국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도전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의지하는 대로,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어보면서 하나하나 해나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우선 철저하게 혼자서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내게 필요한 인연들도 내가 직접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출국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인턴쉽을 대행해 주겠다고 약속한 업체에서 나온 분의 안내를 받아 나를 포함한 여섯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호주로 떠났다. 비행기는 홍콩공항에서 경유하고, 시드니로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다.
홍콩도 처음이고 경유를 해보는 것도 처음, 공항에서 막 만난 사람들과 옆자리로 모여 앉는 이 어색함도 처음, 정말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홍콩에 내리자 갑자기 확 더워진 공기에 날씨가 정반대가 된다는 것을 미리 실감할 수 있어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 졌다. 비행시간을 기다리며 가방을 껴안고 쪽잠을 청하면서, 시드니는 어떤 곳일까, 얇은 옷은 넉넉히 가져왔던가, 지금쯤 내 가족들은 무얼 하고 계실까 등 두서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부산했다.
시드니에 도착하고.
공항을 나서는데 후끈 더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신 햇살을 맞고 있는 키가큰 야자나무들이 일렬로 쫘악 늘어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갑자기 마구 영어들이 튀어나왔다.
친절한 미소를 보내며 간단한 인사를 전하는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뭐라고 받아치면 좋을지.
두 볼이 발그랗게 달아올르는데 그것이 두터운 옷을 입고 있어 올라온 열기 때문인지 생소한 세상을 만나 쪼그라든 마음 덕분인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직은 서울을 떠날 때 입은 두께감이 있는 셔츠가 내 살에 닿아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이 내가 과연 이 세상에 잘 적응해 갈 수 있을지, 겉으론 차분했지만 속으론 몹시 불안하고 긴장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잘 할 수 있다고, 소리없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이후 이틀.
지도 한장 들고.
나는 정말 발바닥이 닳도록 다운타운을 헤집고 다녔다. 여기저기 마구 걸었고, 만나는 모든 풍경에서 기쁨을 느꼈다. 공기는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한데다 푸른 바다가 코앞이었다. 책으로만 만나던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가 바로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 풍경들에 정말이지 하나같이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절대 긴장을 풀진 않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지도를 보고 또보고 하길 반복하면서도 생전 처음 만나는 이토록 다른 세상의 어느 작은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두리번두리번. 즐겁고 또 즐거웠다.
바다가 바로옆에 있는데도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덩치가 아주 큰 갈매기들이 내가, 우리가 뭔가를 손에 들고 먹을 때마다 눈이 뚫어져라 노려보았기 때문에 정말 손에 음식을 꽉 쥐고 새들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입에 넣곤 했다. 먹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던 내 친구는 결국 핫도그 반쪽을 갈매기에게 빼앗겨 버리는 일도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도 웃었다. 소리내어 크게. 바닷바람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유쾌한 비명처럼 모였다 흐트러지며 사라졌다.
내가 이용한 업체의 패키지에는 시드니에서 한달간 어학원을 다니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드니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주부터 어학원에서 레벨테스트를 받은 후 4주간 수업을 들었다. 나와 레벨테스트 결과가 같게 나온 분이 같이 갔던 분들 중에 아무도 없어서 그 클래스에서는 나만 한국인이었다. 전세계 비영어권 나라 사람들은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영어’에 각자 나라의 악센트를 얹어서 독창적인 발음으로 서로와 소통했다.
미국영어 발음으로 공부해온 내게 호주발음이 그토록 새로웠으면서도 이 수업에서 만난 클래스메이트들과의 소통은 때로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때의 내가 영어를 좀더 잘했다면 훨씬 수월했을수도 있겠지만.
스물넷의 끝자락.
겨울이었지만 여름.
지구의 반대편에 나는 있었다.
그해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던 시간, 나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시작을 외치며 서 있었다.
하와유,에
아임파인땡큐앤유, 가 자동반사로 나오던 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 말고 다른 표현들로 자연스럽게 받아치기 위한 연습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려 가면서, 하루씩 이틀씩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나는 '적응'이란 것을 해가고 있었다.
그곳,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와 마음이 닮은 그대에게] 저자.
인스타그램 @newish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