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대로의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엄마에게 나는 품안의 자식이었다. 그 세대의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자식은 특히 그런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반장을 도맡아 하고 모든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공부도 왠간히 했던 나는 거의 늘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는 딸이었고, 엄마가 무심한듯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의 '자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영원히 엄마품 속에서 살 것 같던 나는 첫 해외여행을 가기 전 한 판, 첫 해외살이를 하겠다고 호주로 나서기 전 또 한 판, 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 가서 살겠다고 또다시 한 판, 엄마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엄마는 무지하게 싫으셨겠지만, 영원히 엄마 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의 자랑거리이자 단짝으로서의 나의 '자리'가 위태롭게 느껴진대도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나대로의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해외'는 나에겐 아주 궁금한 세상이었다. 온갖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여러 풍경과 사람들을 보여주었고, 티비속 모습들을 보다보면 내가 지금 저 화면속 세상에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곤 했었다. 막연한 호기심과 설렘,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한껏 얽혀서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서 여실한 존재감을 꿈틀거릴 때마다 '해외'에 나가고 싶었다. 어디라도 좋았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 내가 속해있지 않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 보고 싶었다. 소심하고 겁많은 내 안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당차고 용기 있는 나를 끄집어 내어 마구 괴롭히고 싶었다. 세상을 조금더 크게 내 안에 담아보고 싶었다. 꽤, 간절한 바람이었다.
대학4학년 개강을 이틀 앞두고 무턱대고 휴학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토록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으면서, 대학에서는 엉망진창이었다. 전공과목에는 흥미가 없었고, 학교는 너무 멀었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나는 스쿨을 타고 오가는 것 자체에서 이미 힘이 빠졌고, 그렇다고 기숙사를 들어간다거나 자취를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배짱도 없어서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다. 이대로는, 등떠밀리는 졸업을 할 것 같았다. 아직 '학생'일 때, 그래서 훨씬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었고 더이상의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자 바로 휴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엄마는 묵묵히 내 의견을 받아들여 주셨다.
휴학을 결정했으니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도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우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알바사이트를 휘저어 다니며 지원을 하고 원하는 곳들을 찾아 다녔고, 그렇게 휴학한지 일주일만에 장충동의 한 호텔에서 리셉션 및 주차 정산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 십여개월의 경험은 내게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줬다. 티비에서나 보던 유명 연예인들과 직접 눈을 마주하고 인사도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떵떵 거리고 산다는 부자들도 참 많이 보았다. 하루에 천만원씩 한다는 입이 쩍 벌어지는 고급스러움을 갖춘 방에도 들어가보고, 그 방 안의 러그나 카펫의 결 하나하나 느끼고 다른 점을 알아채는 고객분들이 계시니 그 쪽은 되도록이면 피해서 걸으라는 주의를 받고 속으로 무척 놀랐던 기억도 있다.
평소에 본 적 없는 고급승용차나 벤도 무수히 많이 봤고, 한 조직 내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그들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지, 먹이사슬 같은 그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처음 보는 세상이었다.
이 전에 알바를 안 해본 것도 아녔는데, 이 때 만난 세상은 그 때 정말 세상물정이란 것을 잘 몰랐던 한 여대생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좋은 의미로도, 그 반대의 의미로도.
호텔업에 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호텔'이라는 하나의 조직 안에 성격이 달라도 정말 너무 다른 부서들이 모여서 하나의 시너지를 내어가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인사부, 총무부, 재경부, 마케팅부서, 식음료팀, 프론트, 컨시어지 등등 각 부서마다 요구하는 자질과 조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어느 부서라도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삐걱대기가 십상인 곳. 상냥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에 대한 세밀한 센스를 발휘해야 하는 때도 많은 곳.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다.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 이외에도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일을 하니 시간이 맞지 않아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때 내 스케줄은 아침 여섯시반부터 두시반까지였는데, 집이 인천이었던 나는 시간에 맞춰 가기 위해 아침 네시반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다. 내가 맞이하는 아침은 대부분 깜깜했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중에 날이 밝았다. 제법 차가운 새벽공기가 감도는 이른 아침의 한산한 지하철 안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출근길에 나설 때마다, 피곤함에 따끔거리는 눈을 여러번 비비며 밀려오는 잠과 씨름을 해야했다. 졸다가 내려야 할 역을 놓친 적도 있었고.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이 모든게 그리 짜증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해외'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었대도, 손을 벌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번부터는 내 힘으로 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엄한 엄마로부터 오는 외로움과 우울감 같은 것이 쌓이고 있었다.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나에겐 허용되지 않으니 답답하고 억울했다. 문득,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기만 해도 모자란 존재인 엄마 그리고 아빠에게 이런 마음이 쌓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두 분의 세대에서 습득하고 익히신 최선의 방법으로, 두 분의 기준에서는 최선을 다해 나를 대하고 계신 것뿐이었다. 나와 달랐을 뿐이었다. 내가 하고싶은 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나 자신의 두려움이나 게으름이지, 결코 두 분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더이상 핑계를 찾고 싶지 않아졌다.
나의 호주생활은 십여개월 후 시작한다.
그 경험은 장충동 호텔에서의 첫 경험보다 더 강렬했고 짜릿했으며 설레고 아팠고 보드랍고 따가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내가 한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나와 마음이 닮은 그대에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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