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입고 벗어왔던 속옷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속옷이 나의 몸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속옷이라는 것은 보통 브래지어와 팬티를 말하는데, 그것들의 용도와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둔감했던 나의 몸은 비로소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기간 속옷을 위아래로 열심히 착용 해왔지만 처음 생각해보는 문제였고, 이는 곧 여성의 몸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사회통념상’ 여성의 가슴은 왜 가리는 것이 필수이고(특히 젖꼭지) 게다가 가린 것을 또 가려야 하는 동시에 볼륨감은 있어야 하며, 모아야 하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하는 것일까? 여성 팬티의 디폴트 값은 왜 사타구니를 압박하면서도 엉덩이도 다 가려지지 않는 삼각팬티이며, 까끌하고 몸에 그대로 자국이 남는 레이스 장식 같은 것들이 달려있을까? 등의 질문들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기에는 애초에 시중에 판매하는 많은 속옷들부터가 그렇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왠지 어른 여성들이 입는 멋진 세트 속옷을 입고 싶어 지긴 한다. 그래서 나도 또래들 사이에서 많이 입는다는 브랜드의 속옷 가게를 한번 가보았었다. 그 브랜드는 가슴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소문이 나서 인기가 많았다. 가게에 들어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속옷들을 보다 보니 왠지 눈이 불편해졌다. 그나마 편해 보이는 단순한 색의 속옷을 골랐는데 하필 내게 맞는 치수만 없어서 고민하던 내게 속옷 가게 직원은 말했다. 한 사이즈 작은 걸 사도 큰 차이가 없고 시간이 지나면 속옷이 늘어나니까 그냥 사도 괜찮다고 했다. 브라만 잠깐 착용해보고 크게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사서 가게를 나왔다. 그 조금 작았던 브라는 내게 속옷에 대한 의문을 강력하게 품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그 속옷을 입고 밖에 나간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발생했다. 갑자기 흉부가 꽉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훅이라도 풀고 있으면 나으련만 여름이라 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볼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서 가장 먼저 브래지어를 벗어서 던져버렸다. 가슴 밑에는 와이어가 있던 자리를 따라 뻘건 자국이 남아있었고, 두터운 패드 때문인지 숨을 못 쉬어서 그런지 흘린 땀으로 흥건했다. 브라를 벗고 나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면서 회의감이 몰려왔다. 속옷이 나를 해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토록 불편한 속옷을 왜 내 돈을 주고 사서 몸에 착용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브래지어의 어원은 보호대라고 하던데,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속옷은 스포츠 브라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정말로 가슴을 보호해야 할 때는 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브라는 보호대보다는 가리개에 가깝다고 본다. 브라가 가슴에 끼치는 압박감, 답답함, 찝찝함, 축축함 등의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보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함에도, 가슴을 가리거나 심미적 효과를 위해 착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의 가슴은 더욱 불편해졌다. 그 브라의 흉부 압박 사건(?) 이후로 각성하여 내 몸에 맞는 속옷을 고르는 기준이 생겼는데, 우선은 와이어가 없고 컵 사이즈보다는 몸통과 가슴을 압박하지 않는 크기를 기준으로 한다.
요즘은 노와이어브라나 심리스, 브라렛 등 조금 덜 불편한 브라들이 시중에 많이 나왔지만 당연하게도 브라를 입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불편하다. 편안함을 컨셉으로 나온 브라들의 광고 문구는 주로 '입지 않은듯 편안해요~' 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냥 입지 않으면 '편안해요~'이기 때문에 조금 웃긴 문구라는 걸 알 수 있다. 나중에가서는 팔을 꺾어가며 브라의 훅을 잠그고 풀거나 몸통의 반의 반만 한 작은 천 쪼가리에 몸을 욱여넣는 것 또한 점점 불편해져서 지금은 아예 민소매 티에 조금 두꺼운 면이 덧대어져 있는 것을 속옷 대신 입거나 니플 패치를 붙이는 편이다.
내 몸이 브라로부터 해방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해방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 자유로운 몸의 감각을 느끼고 나서는 예전에 사두었던 속옷들을 다시는 입을 수 없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다들 집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해방감을 공유할 수 있는 여성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머릿수가 모이면 더 나은 해결책(노브라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못하는 사회가 도래한다거나 하는...)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생긴다.
아무튼 나의 가슴은 공공재가 아니기 때문에 만인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치 않고, 누구의 기준인지 모를 예쁜 가슴의 형태를 늙어서까지 유지하고 싶지도 않다. 가슴에 달린 젖꼭지의 형태도 어쩌다가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젖꼭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의 신체 중에서 눈에 띄기 쉽지만 은밀하다면 은밀한 부분이어서 그런지 유독 젖꼭지를 조롱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들에게 젖꼭지가 없다면 모를까 가슴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달려있는 것인데, 그것을 형태조차 보이지 않도록 꽁꽁 감추지 않았다고 욕하는 건 좀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젖꼭지도 소중한 몸의 일부인데 이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좀 거두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기준에서는 때와 장소에 따라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아랫도리의 해방을 이야기해보겠다. 이번 여름을 맞이하여 크라우드 펀딩으로 여성용 사각 트렁크를 후원해서 지금 입고 있는데 정말 너무 좋다. 사타구니를 조이는 느낌이 전혀 없어서 이제야 하체에 피가 통하는 느낌이다. 다리를 벌려도 속이 훤히 비치거나 하지 않으며 실내에서는 위에 또 다른 바지를 또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디자인이다. 게다가 벗을 때 땀 때문에 돌돌 말려 내려가지도 않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삼각팬티 때문에 앞은 바람 통할 날이 없지만 뒤는 휑했던 지난날들이여 이젠 안녕이다. 불편한 삼각팬티를 탈출해보려고 여성용 드로즈를 샀다가 입고 앉는 순간 드로즈가 말려 올라가 서혜부를 더 심하게 압박해버렸던 과도기를 지나 드디어 내 몸에 맞는 편안한 아래 속옷을 찾은 것이다. 사각 트렁크를 입다가 어쩌다 한번 전에 입던 삼각팬티를 입게 되었는데 이제 다시는 삼각팬티를 입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며 입어왔던 여성의 불편한 속옷을 위아래로 벗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벗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몸이 편안하다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하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 동시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나의 몸을 불편한 채로 방치해 두었는지 실감하며 내 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몸의 불편함을 알아가는 과정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몸의 감각과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는 것이 나를 알 수 있는 기본적이고도 가장 쉬운 방법이다. 지금 내 심장이 편안한 속도로 두근대고 있는지, 아니면 가슴이 답답한지,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인지, 어딘가 습하고 축축하고 불쾌한지, 가렵거나 아프진 않은지, 어떤 자국이 남았는지 아니면 한여름에 땀 때문에 돌돌 말려가는 속옷을 벽에다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나는 감정이 올라오는지와 같은 것들을 자주 시간을 내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경험상 브라를 제거한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가슴의 소리가 더 잘 들려오기도 했다.
몸이 편하면 정신적으로도 한결 여유가 생기는 것이라, 불편한 속옷으로 부터의 해방은 현대의 피로 사회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 여긴다. '사회통념상' 당연하게 여겨지던 불편함에 의구심을 가지고 점점 나은 방향으로 개선 되길 바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속옷을 벗어 버리고 몸의 자유와 해방과 그로인한 편안함을 만끽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