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00여 편의 작품들이 공개된 가운데 초청작인 데이비드 미쇼 감독의 <더 킹:헨리 5세>가 최고의 화제작으로 주목받았다. 최연소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영국의 라이징 스타 티모시 샬라메가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티켓이 오픈된 지 1분 만에 매진되며 그 인기를 입증해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서 출발하여,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졌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감독은 전쟁 영웅으로서 헨리 5세보다, 권력 자체에 집중해 전쟁이 야기하는 피폐함 등을 현대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왕자 ‘할’의 성장 과정을 그려낸다. 왕자 시절 할은 궁을 버리고 나와 평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추고, 패싸움을 하며 망나니처럼 살아갔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 헨리 4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숨을 거두고, 왕위계승을 이어받을 그의 동생마저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왕좌에 오르기 전, 할은 이미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었다. 그 잔혹함에서 벗어나고자 궁을 벗어났었기에, 즉위한 후에도 그는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굳건하던 그의 신념은 프랑스의 끊임없는 도발로 국가의 위상을 지켜야 하는 왕으로서의 책임과 대치된다. 폭력과 살상을 끊임없이 거부하던 그는, 결국 신념을 꺾고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 지역을 침공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인지 직면한 것이다. 프랑스군을 하나하나 처치해나가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복잡함이 잔뜩 비추는 그의 얼굴엔 왕관의 무게가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에 남겨진 것처럼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잉글랜드 왕가의 정통성이 굳건하게 세워지고, 헨리 5세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이자 최전성기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아쟁쿠르 전투는 헨리 5세의 가장 큰 업적인 만큼 영화에서도 가장 무게감 있게 다루어진다. 이때 맨바닥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멋지기보다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전쟁의 잔혹함을 전달하며, 헨리 5세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평화’라는 신념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참혹한 전투가 주요 배경인 만큼 영화 전반에서는 인위적인 조명 대신 자연스러운 빛을 활용한다. 전장 한복판에서의 치열한 다툼, 개인의 신념과 사회적 책임, 인간적인 두려움 등이 부딪히는 동안 헨리 5세의 심리는 주로 빛과 그림자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빛의 활용은 아쟁쿠르 전투 전 연설 장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비가 내린 뒤 채도가 낮아진 하늘 아래, 일반 병사들과 나란히 선 헨리 5세는 특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도, 위엄을 드러내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병사들을 향해 ‘우리는 전우이며, 오늘 함께 피 흘리는 자는 나의 형제다’라고 크게 외칠 뿐이다. 이 장면은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에서도 가장 울림이 깊은 장면으로 손꼽힌다. 흐린 하늘이 비추는 그의 얼굴은 담담하지만, 그 어떤 주인공들보다 용맹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헨리 5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사도, 리더십의 대명사로서 손꼽힌다. 제멋대로 살아가던 탕아에서 역사가 기억하는 군주가 되기까지, 영국이라는 공간 너머에서 헨리 5세의 삶은 오늘날 이곳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전한다. 어깨에 얹은 책임의 무게를 직시하며, 때로는 강력한 신념만큼이나 그것을 꺾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글 NEWLOOKS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