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이슈마엘

억압된 욕망의 외침 - 알튀세의 호명테제로 읽다

by 백건

"콜 미 이슈마엘": 억압된 욕망의 외침 - 알튀세의 호명테제로 읽다

오늘 우리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의 강렬한 첫 문장, "콜 미 이슈마엘"을 통해,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가 제시한 혁명적인 개념, 호명 (Interpellation) 테제의 심오한 의미를 탐험하는 특별한 여정을 떠나보려 합니다. 알튀세의 호명 테제는 간단히 말해, 사회가 우리를 특정한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주장입니다. 국가는 '시민'으로, 학교는 '학생'으로, 회사는 '직원'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고 규정하며, 우리는 이러한 호명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역할과 위치를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죠. 호명 속에 이미 체재의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듯 말입니다.


자, 이제 "콜 미 이슈마엘"을 알튀세의 렌즈를 통해 다시 한번 바라볼까요? 화자는 우리에게 자신을 '이슈마엘'이라고 불러달라고 능동적으로 요청합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자기소개처럼 보이지만, 이 행위 속에는 사회적 호명과는 다른, 주체적인 정체성 형성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이슈마엘은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버려진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의 아들이 아닌 인간의 육체적 관계로 태어난 존재로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지만 종의 몸에서 태어나 광야로 쫓겨난다-소설 속 화자가 스스로를 '이슈마엘'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어쩌면 기존의 사회적 호명에 저항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정의하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는 사회가 부여한 이름 대신, 소외되고 주변화된 자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억압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요?


알튀세에 따르면, 사회는 이데올로기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한 주체'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콜 미 이슈마엘"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한 일종의 균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는 사회가 그에게 부여할지도 모르는 이름 대신, 스스로 상처 입고 고독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사회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요청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슈마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성경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텍스트 안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자기 명명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라기보다는, 기존의 의미를 전유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억압된 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죠.


"콜 미 이슈마엘"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이름에 얼마나 충실하게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 내면에는 사회적 호명과는 다른, 억압된 채 잊힌 '이슈마엘'과 같은 존재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알튀세의 호명 테제는 때로는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콜 미 이슈마엘"은 그 감옥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가려는 용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체적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사회적 호명에 저항하며,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찾아 나서는 험난하지만 의미 있는 항해를 시작하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속의 '이슈마엘'에게 조용히 귀 기울여 보세요. 그 이름은 여러분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며,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싶으신가요? "콜 미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이름]!" 이제 침묵을 깨고,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시간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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