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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나 Jan 29. 2020

취미 이즈 쿠킹

우울증 극복하는 중

무슨 우울증이냐고 하겠지만 나도 이게 우울증인지 모를 만큼 우울했다.


무기력증은 자아비판, 비난으로 이어지고 많아지는 생각에 점점 빠져들자 피곤해서 가끔 한 병씩 마시던 맥주는 생각하기가 싫어서 매일 마시게 되었다. 하루의 피곤을 풀기 위해 기분 좋게 마시는 게 아니라, '취하고 싶다'라는 목적으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이거먹고 취해서 어! 생각하지 않겠어'와 같은 다짐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집에 오면 자연스레 회사에서 산 저녁거리를 데우고 맥주병을 까는 게 나의 약 2주 간의 생활이었다.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산 음식과 맥주

우울의 끝을 달리던 어느 날. 그날도 아무런 자각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내 모습이 갑자기 제 3자의 모습으로 보이던 날. 나는 술에 의존해서 생각을 지우는 일을 그만뒀고 내 상황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내가 내 욕을 제일 잘할 수 있다.


매일 매 순간. 나에게 욕하고 뭐라하던 것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했고

그 다음은 딴생각을 안하게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아보았다.


요리를 시작했다.

회사 밑 카페테리아는 도시락을 파는데 직원 할인 60%를 받으면 약 3-5불 내로 먹을 수 있다. 샐러드, 샌드위치, 비빔밥, 빵 등 다양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기에 사실 내가 힘들여 요리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매일 같은 음식을 먹다 보니 질릴 때로 질린 나는, 다른 음식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달은 행복했지.. 먹을만 했지..

내게 요리는, 질려버린 음식을 대체할 만한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대충 한 끼를 때워먹는, 생존을 위한 기술 정도를 넘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요리를 한다는 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더라.

한국 집에서 요리를 할 때에는 풍성한 식재료들 사이에서 마음껏 해 먹었지만 여기서는 식재료 장보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장보기가 절대 쉬운 게 아닌 게, 내가 이번 주에 뭐 해먹을지를 미리 다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어떤 감자가 된장찌개용일까나

예를 들어, 된장찌개를 한다고 하자.

두부, 마늘, 호박, 감자, 고추 등을 담아두고

해물로 할지 육류로 할지를 정하고

몇 인분을 해둘지를 정해야 한다.

된장찌개 1인분을 한다고 하면 남은 재료들이 향하는 곳은 냉동실이거나 그대로 썩어서 쓰레기통으로 간다.


거의 주중에는 매번 사 먹게 되니 양식을 쉽게 접하는데, 한국 집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주중에 짜고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을 자주 먹게 되니 한식을 찾게 되더라. (티피컬 한국인)
해외에서 한식을 찾는다는 건 많은 기본 향신료를 사야 한다는 뜻인데, 한식은 정말 많은 향신료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일단 해외에서 다른 나라 음식 식재료를 구한다는 건 한국에서 사던 물가에 추가 비용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난 몇 개는 한국에서 가져왔다 흐흐

손이 작은 나는 식재료를 살 때는 좋지만

손이 느린 나는 식사 준비할 때 기본 1시간 반이 걸린다.

회사 퇴근하고 집에 오면 7시, 전날이나 회사에서 산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나면 7시 반. 

슬슬 내일 점심을 준비해볼까 하면 8시. 9시 반에서 10시가 다 되어야 완성이 된다.

도시락 통에 담아두고 샤워하고 침대에 호다닥 뛰어들어가는데 요즘 출근이 오전 7시라서 5시 반 기상이기 때문에 어서 잠에 들어야 한다 흐흐


타이트한 스케줄로 짜인 퇴근 후 일정은 잡생각이 들지 않게 했다. 요리 손질부터 완성까지 오롯이 요리 자체에 집중해야 했고 무엇을 해먹을지 어떻게 더 맛있게 만들지 검색하고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내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그 성취감은 작지만 확실하게 느껴져 스스로를 대견하게, 대단하게 여기게 했다.

나시고랭을 만들어볼까요?


요리를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라니) 그래서 뭔가 자랑하고 싶고 그래서 나누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자 음식을 만들면 자꾸 나눠주고 싶게 되었다. 인턴 오빠들에게 나누고 (같은 처지의 인턴.. 외노자들) 점심을 조금씩 더 만들게 되고 (그래도 여전히 손이 작아서 하하) 간식을 만들어 회사 오피스 사람들이랑 다 같이 나눠먹고... 점점 회사에 밥 먹으러 가는 건지 일하러 가는 건지 껄껄


바나나 누텔라 와플과 오꼬노미야끼 나눠먹기

자리에 털고 일어나기가, 그러니까 말 그대로 누워있고 앉아있다가 일어서서 뭘 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편하기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힘들어서 편하게 있고 싶었다. 우울한 기분에 잠겨 취해있는 기분. 내가 우울하구나를 느끼면서도 허우적거리며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던 상황. 두 달은 그랬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되지, 이게 내게 도움이나 될까 하는 갈아먹고 갈아먹는 하루하루.


일어나 요리를 했다. 재료 산게 아까워서, 또 회사가서 질려버린 햄버거를 먹기 싫어서, 그리고 스스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내게 보여주고 싶어서.


굴소스 볶음밥에 굴소스를 3번 둘러도 괜찮아. 오늘은 짜게 먹고 싶었으니까.

애호박전 부침가루에 물을 좀 부어도 괜찮아. 새로 만들면 되니까.

알리오 올리오에 간이 하나도 안돼도 괜찮아. 요즘 짜게 먹었으니까 싱겁게 먹지 뭐.

밥이 좀 타도 괜찮아. 물 넣어서 누룽지로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는 과정.

나는 우울증을 잘 이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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