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퇴사가 용기가 될 수 있기를.
퇴사 전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애써 부정했다. 이 회사가 정상이고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전 회사는 한국이 아니거나 스타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고 나니 웃기기만 한 이유이지만, ‘첫 회사'라는 생각에 모든 기준점을 이 회사에 뒀던 것 같다.
분명 데이터 분석팀이었는데, QA가 부족하니 데이터 분석팀은 QA팀도 겸임하라고 했다. 몇 주 후, 마케팅 팀원(이라고 쓰고 1명이라고 읽는다)이 육아휴직 중이니, 마케팅도 해야 된다고 했다.
“어.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신입일 때는 돈이나 워라벨 이런 게 중요하지 않아. 요즘 애들이 다 그런 거 이야기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뭘까? 기회지. 해볼 수 있는 기회. 너한테 마케팅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줄게.”
그래서 결국 결제 데이터 분석, 모바일 앱 QA, 마케팅 메일을 매일(주말 포함) 발송, 앱 푸시 알람 발송 업무까지 모두 하게 되었다. 모른다, 일이 많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데 너 안 할 거야? 네가 기회 포기할 거야?’라고 했다.
회사 일과 별개로, 직원들과의 관계는 너무 좋았고 너무 즐거웠다. QA 하면서 개발팀과 다투고 (00님, 자꾸 그러면 저 이슈 찾아놓고 금요일에 알려드리는 수가 있어요.), 점심 뭐 먹을지 맛집 공유하고, 가끔 커피 내기로 가위바위보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밥 먹는 게 어려웠다. 마음이 복잡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걱정하는 동료들의 위로도 귀찮았다. ‘대신 일해줄 것도 아닌데. 뭘 걱정하는 거야'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들었다.
퇴근하고 싶은데, 퇴근하지 못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아침 30분 회의, 저녁 30분 회의. 그럼 일할 시간은 7시간도 안되는데, 그 안에 저 많은 걸 다 해야 집에 보내준다고? 모든 게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고, 내게 화낼 대상만 던져주면 온몸으로 다 화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퇴사를 고민하게 했던, 가장 큰 일은 이거였다.
여김 없이 밤 10시까지 일을 하던 중, 퇴근하지 않은 대표는 내게 영어 잘하냐고 물었다. “영어 기사 같은거 찾아서 읽을 줄 알지? 너 해외 00회사의 비즈니스 모델 조사해서 내일 알려주라.”
해외 00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우여곡절 끝에 보고하고 나서, 돌아온 월요일. 나는 사업팀의 팀원이 되었다. 해외 00 기업의 조사를 해봤기 때문이다. 사업팀의 첫 업무로 외부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사의 다음 스텝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회의라고 했다. 그건 또 다른, 회사에서 내게 준 기회라고 했다. 회의는 이틀 후였다.
회의 참여 2시간 전에 내가 조사한 자료에서 비즈니스적으로 질문할 거 준비하라고 했고, ‘도대체 비즈니스적 질문이 뭐지? 나 궁금한 게 없는데...’라는 마음과 함께 30분 전에 보고를 했다.
"야. 네가 지금 질문한 거 다 틀렸어. 그냥 처음부터 틀렸어. 그래서 발표는 제대로 하겠니?"
"제가 발표를 하나요?"
"야, 그럼 널 왜 데리고 가니?"
"저 발표 못하겠습니다. 아예 준비되지 않은 부분이라, 심지어 외부 미팅인데 이렇게 준비하지 않은 채로 발표하는 건 회사에도 리스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해봐. 근데 못하면, 나 같으면 진짜 쪽팔리겠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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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업팀 되어 보니까 어때? 좋지!”
“다들 힘내라고 해요. 하하.”
“뭐? 너 그게 대표 앞에서 할 말이야? 내가 사업팀을 지옥 같다고 말한다고 해서, ‘다들 저보고 힘내라고 해요'라고 말하는 게 맞아?”
“사업팀이 지옥 같다고 했지? 맞아. 근데 사업팀 멤버로서, 내가 지옥에 빠진 사람인지 아니면 지옥에 있는 악귀인지 생각해야 해. 네가 보기에는 사업팀 다른 멤버들이 사람 같니 아니면 악귀 같니? 내가 볼 때는 나를 잡아먹는 악귀야.”
내 욕을 듣는 것도 힘든데, 내 주변 동료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맨날 싸우고 언성을 높이는 드라마를 보고 나면, 그날 기분이 매우 저조해지지 않는가? 나는 감정 소모가 엄청 심한 드라마를 매일 보고 있던 거였다.
(+ 추가)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거라고 하던데, 딱 내 이야기였다.
https://pgr21.com/humor/419661 (원본)
퇴사 고민하기
남은 사람에게는 퇴사가, 내가 해내지 못한 용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호기이자 객기일 수도 있다. 퇴사가 호기와 객기가 되는 데에는 감정이 큰 요인이 되기도 한다. 큰 일인데도, 사람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냉정하게 봐야 했다.
우선 주변 지인들과의 만남을 줄였다. 만나면 맨날 우는 소리를 하는 나. 그리고 나오지 않는 해결책. 찡찡거려서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니, 서로 힘든 시간을 갖지 않도록 만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말을 줄였다. 어차피 입을 열어서 나올 말이 불만 밖에 더 있는가.
마지막으로 다 적었다.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적었다. ‘힘들다. 울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등등. 다 털고 나니 고민거리들이 보였다.
퇴사를 고민한다는 건, 남아있을 이유를 찾는 것과 같다. 어쩌면 입사했을 때의 꿈과 목표를 다시 리마인드 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 그리고 떠날 수 없는 이유.
남아야 하는 이유
경제적 문제. 월세 등
신입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
취준생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이직하기 어려움
좋아하는 도메인
남아있을 이유만 보면, 사실 남아야 한다. 하하. 하지만 떠나고 싶은 이유가 절대적일 수 있다.
자존감을 넘어서, 몸까지 상함 (식욕부진, 출혈, 가슴 떨림)
계속 들어온 욕설과 폭언
감당할 수 없는 일의 양과 인정해주지 않는 회사
다 적고 나서, 고민했던 건 이거 나만 유난인 걸까? 였다. 혹시 원래 신입일 때 다 겪는 거 아닐까. 3, 6, 9개월 차에 현타를 한 번씩 겪는다는데, 내가 그런 거 아닐까. 연차가 쌓이면 괜찮지 않을까.
내 결론은 아니다였다. 회사에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 동료들에게 물어봤을 때, 내가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이 모든 고민의 끝은 퇴사라고 봤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나를 지키는 무기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용기였다.
퇴사한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하다. 더 빨리 퇴사를 고민하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 기억은 미화되어 추억이 된다는데, 다행히도 이 경험은 여전히 기억이다.
나는 이 글을 퇴사를 고민하는 신입들에게 응원과 함께 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당신의 퇴사가 호기나 객기가 되지 않게 스스로의 상황을 더 돌아보고, 용기가 되었을 때 퇴사하라고.
아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야근 수당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