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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명 Mar 31. 2017

염전에서 나시족 국수 먹고 천주교 성당을 가다

천년 염전으로 살아온 민족과 천주교 성당 - 최종명의 중국 대장정(06)

다리를 건너 자다촌(加达村)으로 들어선다. 8월의 여름 마을은 한산하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집 안에 있다. 차를 내주는 아버지는 앞니가 빠진 잇몸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천연의 소금처럼 방부제 하나 없는 해맑은 미소다. 수줍음이 많은 아들 녀석은 말도 없이 시무룩하더니 사탕 하나 받고서야 겨우 눈을 마주친다. 개구쟁이처럼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도 이방인 앞이라 그런지 낯을 가린다. 친해지기까지 이 세상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염전 자다촌 가정집
나시족 아버지

1시간 반이나 걸어 들어온 마을이다. 더운 날씨에 다시 나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었는데 마침 마을의 청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갈 생각을 할 때 어디선지 꼬마 녀석이 뛰어온다. 한 손에 소금을 한 봉지 들고 사라고 한다. 1kg이나 되는 양을 10위안 주고 샀다. 외지인이 왔다는 소식에 집에서 한 움큼 집어 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냥 먹어도 되냐고 했더니 채소나 고기 요리할 때 넣어 먹으라고 한다. 정제가 안 된 자연 그 상태이니 그럴듯싶다.

나시족 아들

마을을 벗어나 공사 중인 도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돌아온다. 뒷자리에 앉아 흐르는 강물과 다양한 색깔을 지닌 산을 파노라마처럼 바라본다. 정말 신비한 느낌이 드는 지방이다. 천일염을 만든 지혜가 숨은 이산하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강 너머 푸른 나무가 자라는 마을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며 세상사 다 잊고 ‘도’라도 쌓고 싶어지는 풍광이다. 게다가 쑤여우차(酥油茶)에 짭짤한 맛을 선사한 고마운 자연이 아니던가?

공사장에서 만난 꼬마 아가씨

공사장에 아빠를 따라 나온 꼬마 아가씨가 너무 귀엽다. 동그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띠고 앉았는데 우리 시골의 순박한 아이와도 닮았다. 마침 방학이어서 놀러 나온 것이다. 산도 들도 아름다운데 꽃도 따고 나비도 쫓고 뛰어다니며 놀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언뜻 든다. 여행 온 이방인의 가벼운 오만이라고 금세 자수한다. 마냥 미소만 짓고 있길래 중국어로 말을 건네본다. 다행히 표준어로 말이 통해 이런저런 대화가 가능하다. 한국사람이라고 했더니 환하게 웃는다.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자랑도 한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빠도 마냥 웃는다.


점심은 지방 특산인 국수를 먹었다. 큰 들통에 국수를 끓인 후 작은 그릇에 담아 준다. 그런데 조약돌을 한 움큼 담아서 함께 가져온다. 돌을 반찬으로 먹으라는 것인가? 국수의 이름을 몰랐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국수 이름이 자자멘(加加面)이다. ‘더하다’는 가(加)를 중복으로 붙이다니 의아하다.

옌징 국수 자자멘
국수와 함께 나온 조약돌

그릇에 담긴 국수를 후루룩 한 입에 먹고 나면 다시 국수를 더 담아준다. 먹고 또 먹고 하다 보면 몇 그릇 먹었는지 서로 모르게 된다. 한 입 먹고 돌 하나를 끄집어 내놓는다. 그렇게 매번 돌로 표시를 한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맛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함께 내온 돌 개수만큼 국수를 먹으면 자기 딸을 내준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딸 이야기가 전설이라면 상금은 현실이다. 어느 가게는 지금껏 최고 기록이 147그릇이고 기록을 깨면 500위안(약 8만 5천 원)을 준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돌을 씹어먹을 정도의 식성이라면 딸을 주고 싶지 않을까? 그만큼 일도 잘할 터이니 말이다.


나시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것 외에 티베트답지 않은 것이옌징에는 또 있다. 바로 천주교당(天主教堂)이다. 지금도 상당수 주민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니 그저 유적지로만 남은 성당이 아니다. 티베트에 남은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1865년 프랑스 신부 삐에뜨(Biet)가 세웠다. 정교합일의 땅 티베트 중심에서 도망쳐 변경인 옌징으로 후퇴한 삐에뜨는 마을 주민을 병을 치료해주며 차츰 신임을 얻어 성당을 세웠다.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 와인 제조법도 알려주는 등으로 포교에 성공한 것이다.

옌징 천주교당 십자가 창문

그렇지만 티베트 불교와의 갈등과 정부 관원으로부터 박해를 많이 받았다. 1949년까지 17명이나 되는 외국인 신부가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포교를 이어왔다는 이야기다. 신중국 개국 후에 잠시 ‘종교의 자유’가 오나 싶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성당이 완전히 훼손됐다. 개혁개방 이후 종교활동을 보장받고 성당을 재건한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 1997년에는 티베트 청년이 첫 신부가 되기도 하는 등 나시족과 티베트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마을에 주민의 80%가 신자이니 우여곡절 깊었는데도 꾸준히 맥을 이어온 ‘역사적인’ 성당이다.

현지화된 성당 건축문양

현지 민속과 서양식이 혼합된 문양과 구조여서 그런지 건축물이 독특하다. 백색 담벼락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창문을 만들었다. 성당 안은 몇 군데 한자가 쓰여 있긴 하지만 대체로 우리네 성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당 입구에 서서 뒤돌아서면 고원의 산과 하늘에는 영락없이 티베트의 바람이 분다. 오성홍기 나부끼지만 그래도 티베트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차마고도를 달리는 마방이 소금을 얻는 땅 옌징,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노력이 지혜롭게 힘을 합친 땅이다.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협곡과 설산을 넘어야 하는 마방, 말의 생명까지 책임지는 그들에게는 티베트 불교나 천주교 모두, 소중하고 사랑이 넘치는 ‘신(神)’이었을지도 모른다.

티베트에 자리잡은 천주교당
옌징 마을의 천주교 성당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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