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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부 윤석열과 이승만] ③ 정치보복과 비상계엄

[뉴스하다]권력감시

by 뉴스하다

시민들 목소리 무시, 비상계엄 선포


이승만과 윤석열 공통점은 또 있다. 비상계엄을 아무렇지 않게 선포했다는 것. 하야를 이끌어낸 4.19혁명 전날 시민들 시위가 거세지자 이승만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2024년 12월 14일 국회 탄핵 표결을 앞두고 엄청난 인파가 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윤석열이 독재자 이승만을 따라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이승만은 1948년 여수순천사건과 제주 4.3사건,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60년 4.19혁명, 6.25 전쟁 당시 3회까지 포함해 7차례 계엄령을 발동했다.


윤석열은 2024년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인과 경찰 등을 출동시켜 전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박정희와 같은 친위쿠데타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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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를 통해 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전공의 및 의료인 불복종 시 처단, 영장 없는 체포, 구금, 압수수색 등의 조치를 선언했다.


포고령 발표 후 특전사 예하 707특임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수방사 군사경찰특수임무대가 투입돼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의 점거를 시도했다. 행정부의 수장이 군사력을 동원해 입법부를 공격하고, 헌법기관인 선관위를 장악하려 한 내란행위다.


비상계엄은 독재시절에만 선포됐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친위쿠데타, 1979년 부마항쟁 등 4차례나 비상계엄을 썼다.


전두환은 1979년 박정희 서거로 10.26 비상계엄을 유지하다, 다음해 5.17 비상계엄전국확대로 5월 18일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1960년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 서울지역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한 10만여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밀려왔다. 시위대와 경찰간 ‘접전’이 벌어졌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사망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부상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위기에 몰린 이승만은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염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16시 30분,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도 게엄령을 선포하여, 언론을 사전점열하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지했다.


경찰은 계엄이 선포되자 장갑차를 동원해 반격을 개시하고, 시민들까지 다수 합세한 시위대는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총기를 탈취해 경찰에 응사했다. 시가전을 발불케 할 만큼 격렬했다.


계엄사는 오후 8시 40분, 탱크를 포함한 예하부대를 서울에 투입시켰다. 계엄군이 서울과 주요도시에 진주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산발적 시위는 계속됐다.


이승만은 4월 20일 담화를 발표했다. 21일 국무위원 전원 총사퇴, 22일 이기붕 부통령 사퇴 후 이승만 성명 발표.


이후 시위대는 “부정선거 다시하라”에서 “이승만 물러나라”로 구호를 바꿨다.


이승만은 시위군중이 민주당 장면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변명했다.


4월 25일, 서울시내 대학 교수 258명 시국선언문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과 태국기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교수시위대에 합세한 시민과 학생들은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4월 26일 10시20분께 이승만은 학생과 시민 대표 면담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야 의사를 밝혔고 오후 1시 전국에 ‘하야’를 방송으로 알렸다.


이승만은 하야 한 달여 만인 5월 29일 오전 8시 5분,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교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5월 30일 민주당 양일동 의원의 추궁에 허정은 “이 박사는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 차 여행한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주선해줬다”라며 “이 박사의 출근은 오히려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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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6천230명이었다.


윤석열은 내란을 저지르고도 이승만과 달리 하야를 거부하고 있다.


윤석열은 지난 12일 녹화방송에서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당당히 맞설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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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복의 극치, 조봉암과 이재명


1958년 1월 13일 이승만 정권은 느닷없이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비롯해 진보당 간부 7명을 구속했다. 간첩사건 조작으로 이듬해 7월 조봉암을 사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제거한 이유는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이재명을 300차례 넘게 압수수색하고 이재명 부부를 법정 앞에 세운 이유와 같다.


검찰을 이용한 방식조차 똑 닮았다.


같은 해 1월 1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조봉암은 벌써 조치됐어야 할 인물이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이 같은 언급은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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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와 재판은 ‘조봉암 제거’라는 미리 마련된 시나리오에 짜맞춰졌다. 그나마 1심 재판관은 일말의 양심이 살아있었던지 5년형을 선고했다. 이승만의 정적으로 잡아넣긴 하되 차기 대선이 끝나면 풀려날 것으로 헤아렸다.


이승만은 1심 판결에 노기충천하고 연일 담당판사를 빨갱이로 모는 관제데모가 열리는 등 조봉암을 제물로 삼으려는 독재세력의 난동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1959년 2월 27일 상고심은 사형을 선고하고 7월 30일 대법원이 재심청구를 기각하면서, 다음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변호인단이 조봉암의 생명이라도 살리고자 정권 측과 협상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 “전과를 뉘우치고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한다”라는 성명을 내어 타협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나는 비록 법 앞에 죽음의 몸이 된다 해도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여전하다”면서 타협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형을 선고한 대법원 판사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총독부 판사 출신이고, 사형집행장에 서명한 법무장관도 일제 판사 출신이었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열혈 독립지사를 살해하는데 종범으로 가담한 것. 이승만이 주범이고 이를 외면한 당시 민주당 지도부와 미국 정부, 그리고 대부분 한국 언론은 공동정범이다.


반세기 뒤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이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해 이승만의 ‘사법살인’을 밝혔다. 그러나 조봉암은 소멸했다. 역사 앞에 사법부도 사죄해야 한다.


윤석열은 특수부 검사생활에서 배운 ‘법기술’로 이재명을 짓눌렀다.


이재명은 위증교사, 공직선거법 위반, 개발비리 등 의혹, 불법 대북송금 의혹,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 등 총 5개 재판을 받고 있다. 그의 부인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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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조국 일가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조국혁신당 대표는 2년간 교도소에 수감된다. 조국 부인은 수년 간 실형을 살다 나왔다. 딸은 의사 면허를 반납하고 재판을 받았다.


이승만은 임기 중 정적인 백범 김구 암살 배후였고, 조봉암을 검찰과 법원의 힘을 빌려 살해했다. 윤석열은 이승만을 빼다박았다.


이창호 기자 ych23@newshada.org

홍봄 기자 spring@newshada.org

참고문헌_이승만 평전_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독부 윤석열과 이승만] ③ 정치보복과 비상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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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hada.org/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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