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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새벽별 Sep 01. 2024

나의 첫 번째 영국 친구 루비 할머니 (1편)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말을 걸고 친구가 되었다

나의 첫 번째 영국 친구의 이름은 루비(Ruby)다. 루비를 만나게 된 사연은 나의 영국 박사 도전기와 맞물려있다.


2018년 여름, 영국에 갔을 당시 한국에서 하던 MBA 석사 프로그램이 한 학기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영국에 가게 된 것은 남편의 공부 때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따로 유학 준비를 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공부를 더 하고 싶다', '기회가 있다면 유학을 하고 싶다'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영국에서의 대학원 과정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학부를 마치고 오랜 시간 일을 했고 그나마 최근에 다닌 대학원이 경영전문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일단 매니지먼트 쪽으로 박사 지원을 해보면 어떨까 계획을 잡았다. 한국에서 하는 MBA 과정은 논문을 쓰지 않아도 졸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논문을 쓰는 석사 과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영국 석사 과정이 워낙 빡세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석사과정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여러 학교를 알아보기보다는 당시 살고 있던 지역의 대학인 브리스톨 대학교 박사 과정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학교마다, 프로그램마다 다를 순 있지만 박사 지원 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박사 과정 동안 논문을 지도해 줄 교수를 찾는 일이다. 내가 그나마 접근해 볼 수 있겠다 싶은 주제를 연구해 온 교수님 한 분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가볍게 만나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생겼다.


친절하게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눌 시간을 내주신 H 교수님


일단 호기롭게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았는데, 그러고 나니 내 영어 실력이 원어민을 만나 유창하게 대화할 정도는 아니라는 현실이 자각되었다. 나는 영어를 정말 잘하지 못하는데, 정작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아마도 열심히 공부해 온 내 전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고 연세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다닐 때도 계속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내가 "영어를 진짜 못해"라고 말해도 보통의 반응은 "엄살 부리지 마"였다. 진짜 못하는데.. 나는 국어, 수학, 과학 대부분의 과목을 좋아했지만 영어는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영어는 이해할 여지가 너무나 적은 과목이기 때문이었다. 사과는 영어로 apple인데 사과와 apple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 이해가 되면 외우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해가 안 되면 단순 암기를 해야 하니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영어가 나에게 달가운 과목이 아니었다. 단어 외우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 (걸어 다니는 영어 단어장인 남편으로부터 영국에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제발 영어단어를 좀 더 외우라는 잔소리를 듣고 있다 ㅎㅎ..)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시험기간에 혼신의 벼락치기로 영어 내신 시험을 잘 넘겼고 그 뒤에도 영어를 잘해보고 싶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긴 했지만 어찌 됐던 당시 원어민과 유창하게 대화할 실력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편하게 대화하는 자리가 아니라 박사 과정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자리이다 보니 부담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영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연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누구와, 어떻게,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지, 누가 나와 영어로 대화를 나눠줄 수 있는지 앞이 캄캄했다. 영국에 온 지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이었고 학교를 다니거나 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 아는 영국인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H교수님을 만나기 하루 전날, 일단 무작정 집을 나왔다.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대화할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다. 요즘은 본인 성격이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소개할 때 MBTI 테스트 결과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내 성격을 설명하면 나는 파워 E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도 잘 건넨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곧잘 대화하고 첫 만남에 친구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나의 성격이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영어로 대화도 좀 연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집을 나선 것인데. 내 나라도 아닌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것도 영어로 말을 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공원을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가 어려워서 카페 몇 군데를 돌아보기도 했다.


신문을 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볼까?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애기 엄마에게 말을 걸어볼까?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작업 중인 학생에게 인사를 해볼까?


집을 나설 때는 혼자 있는 사람이면 쉽게 다가가 말을 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몇 시간째 망설이기만 하고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니 아쉽고, 말은 쉽게 못 걸겠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버사이드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강가 카페 밖 벤치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으셨다. 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큰 용기를 내어 인사를 했다.


"안녕, 내 이름은 아이린(당시 쓰던 영어이름.. 지금은 한국이름을 쓴다)인데.. 잠깐 시간이 있다면 제 얘기를 들어줄 수 있나요?"


할머니는 너무 고맙게도 지금 마침 시간이 된다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해주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영국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했다. 그리고 말을 걸게 된 자초지종도 설명하였다.


"박사 과정을 지원하고 싶어서 학교에 연락을 했다가 당장 내일 교수님과 미팅이 잡혔는데 영어 때문에 너무 걱정이 되어서 말을 걸어봤어요"


루비를 만났던 하버사이드.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길을 쭉 따라 걸어가면 그 길 끝에 카페와 테이블, 벤치가 있다.


루비 할머니는 웃으며 본인이 듣기에는 내 영어가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고 내일 가서 차분하게 잘 대화를 하고 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루비 할머니는 본인은 다리 건너편에 살고 있고 집을 장식하기 위한 물품을 사러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기 전 잠시 쉬었다 가려고 이 벤치에 앉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서로 공통의 대화 주제가 없으면 이야기를 이어가기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대화 중에 공통 주제를 한 가지 찾았다. 루비가 본인을 감리교(기독교의 한 교단) 신자라고 소개하였는데, 나는 거기에 우리 시아버님이 감리교 목사님이라고 대답을 했다. 거기서부터 또 한참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어서 내심 우리 아버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우리 신랑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루비가 감리교에 대해 얘기를 했어도 대답할 말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다행히 루비의 말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부족한 영어 실력에도 루비가 하는 말을 거의 (100% 정확하게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90%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스스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데다가 영국 악센트가 너무 안 들려서 (그나마 리스닝은 잘 된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영국에 가서 처음으로 영어로 하는 대화의 즐거움을 느꼈다.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영국의 10월은 한국보다도 더 쌀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쉬웠지만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대신 서로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했다. 전화번호를 주며 루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화를 걸고 받을 수는 있지만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는 못해. 그리고 내일 있을 미팅을 위해 기도할게"


그때 루비의 말이 큰 격려가 되었고 용기도 더 생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H교수님과도 무사히 미팅을 마쳤다. 당시 나는 MBA 학위를 마치기 위해 하반기는 한국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 가기 전에 루비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다시 영국에 돌아오면 또 전화를 하겠노라 약속했다. 루비는 내가 다시 영국에 오면 본인의 집에 초대하겠다고, 꼭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해주었다. 도움이 절실했던 나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던 친절한 루비 할머니와의 첫만남.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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