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누리다

by 이은

어느 날인가부터 마음 속에 말을 담아놓지 못한다. 할 말과 안 할 말을 나름 잘 구분하고, 혼자 삭여야 하는 말이라면 끙끙대면서도 결국 삼킬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내 말은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오곤 한다. 머리도 마음도 거치지 않은, 혀끝에서 방금 막 만들어진 말이 애써 다문 입술 사이를 기어이 비집고 나온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혼자 정리 못해 주변 사람까지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본다. 심각한 신상문제부터 하찮은 TMI까지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공유와 공감은 분명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람에게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공유해서도 안 될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꾹 참고 삼킨 비밀들이 자아를 키우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이런 믿음이 요즘 흔들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혼자 조용히 고민했을 문제들, 혼자 삭이고 넘어갔을 감정들, 굳이 남과 나누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일화들을 두서없이 꺼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아니 어떻게라도 꺼내놓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이 풀리질 않는다.


오늘 아침 침묵을 누릴 축복을 구하는 누군가의 기도를 들었다.
침묵을 누리다.
침묵을 누린다는 건 무슨 뜻일까. 토해내고 싶은 답답함과 이해받고싶은 간절함이 수시로 침묵을 깨뜨리는 요즘, 침묵을 누리는 것이 축복임을 수긍하게 된다. 수런대는 말들을 품고도 견딜 수 있다면 허겁지겁 말을 쏟아내고 자책하거나 공허해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흩어지는 말들을 끝까지 붙잡아 비밀스런 내 세계를 지키는 일이다.


툭 터져버린 마음 사이로 삐져나온 말들이 누군가를, 그리고 나 자신을 상처내기도 한다. 입 밖으로 낙하하는 말들이 가중되는 말의 값을 치르라고 채근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 내 진심이 맞는 옷을 찾아 입고 나올 때까지 그저 침묵하기를 바라게 된다. 침묵을 누리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