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싫어하지만 요리 프로그램은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건 <냉장고를 부탁해>. 이름 난 셰프들이 15분 안에 의뢰인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완성하느라 주방에서 나만큼이나 허둥지둥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우리집 요리사인 내겐 약간의 위로가 되기도 하고.^^
냉부에서 자주 보던 세프들이 <흑백요리사>에 대거 출연한다는 소식에 완결까지 챙겨보았다. 처음 몇 편의 에피소드가 공개된 후 백수저 재도전자 최강록이 우승했다는 스포일러가 돌았다. 회차가 거듭되며 스포일러는 힘을 얻어갔고 자칫하면 김빠진 결말이 되겠구나 싶었다.
마지막 결승전이 공개되던 날, 이변 없이 최강록이 우승했다는 뉴스가 먼저 전해졌다. 그날 밤 늦게서야 별 기대없이 재생한 최종화, 그런데 결승전은 요리 대결이 아니라 참가자들의 서사 대결이었다. 결승전의 주제부터가 <나를 위한 요리>였으니 말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성된 요리가 아닌 요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사대에 올랐다. 그리고 이야기 두 그릇을 맛본 심사위원은 만장일치로 시종일관 패기 넘쳤던 흑수저 이하성이 아닌, 왠지 허술하고 빈틈 있어 보이는 백수저 최강록의 손을 들어주었다. 요리사의 마음가짐과 진정성, 직업적 애환을 한 편의 에세이처럼 풀어간 최강록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고, 심사위원을 포함한 동료 셰프들의 공감과 자기연민을 끌어내기 충분했다. 영업을 마친 후 쓴 소주 한 잔으로 고단했을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잘 짜여진 서사였다.
흑수저 이하성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순대국을 파인다이닝 요리로 완성해냈다. 방송 내내 그가 선보인 요리들은 하나 같이 실험적이면서도 완성도가 높았고 결승작 역시 훌륭해 보였다. 요리괴물이란 닉네임을 걸고 서바이벌 쇼에 참여한 이하성은 자신의 실력과 자신감을 반복적으로 어필해 호불호가 갈리던 참가자였다. 이런 그의 캐릭터와는 사뭇 다른 감성적인 순대국의 서사는 심사위원과 시청자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요리에 집중했고, 완성된 요리에 그의 이야기를 담아냈지만 아쉽게도 시너지를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우승자 최강록의 소감처럼 결승전의 주제가 다른 것이었다면 우승자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데 조용히 동의한다.
이하성은 20대 초반에 미국으로 건너가 요리를 배우고 여러 나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이라고 한다. 차라리 이 시절들이 남긴 여러 층위의 감정들과 경험들을 결승전 서사에 좀더 적극적으로 녹여냈다면 어땠을까? 출연자들의 캐릭터야 편집자의 손에 달려있는 거라 캐릭터의 붕괴를 허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시종일관 자신만만해 보이려 애썼던 요리괴물의 이면을 볼 수 있어 흥미롭지 않았을까? 애초에 계급 프리미엄을 전제한 서바이벌 쇼에서 백수저이면서도 흑수저 같았던 최강록의 서사보다 그냥 흑수저인 이하성의 서사가 매력적으로 포장되긴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위기 속에서도 끊임 없이 "할 수 있다" 자기최면을 걸어가며 이 자리까지 왔을 준우승자 이하성에게도 진심어린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두 사람 모두 냉부에서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