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 용기

by 이은

끊어진 인연들이 있다. 불통의 시간, 오해가 쌓여갔다. 한 두겹으로도 서로를 갈라놓기 충분했지만 그래도 실체를 가늠할 수는 있었다. 시간이 더 흘렀고 그 사이 각자의 말과 각자의 해석만이 난무했다. 겹겹이 드리워진 이야기들이 그대로 굳어져 어느새 서로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지금도 그 날 그 모습 그 말들을 꺼낸다. 그날로 멈춘 시계는 앞으로 흐르는 법이 없다. 지난 과거, 더 지난 과거들을 파헤치며 그날 사건의 필연성을 납득하려 애쓸 뿐이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실체, 이제 그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기심과 악의만을 가진 피상적 대상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존재로 박제되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이유로든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시간만큼 완고하게 버티는 장사도 없다. 시간은 절대 나서는 법이 없고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이제 사람 사이의 인연에는 도덕적 당위가 없다. 관계의 회복 역시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남는다. 우리보다는 나 자신이 더 중요한 시대에 상대방의 감정이나 입장을 인정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점점더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오해가 풀리는 순간을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다. 각자 쌓아올린 높은 담장을 돌고 돌아 우연히든 어쨌든 재회했을 때, 그간 쌓인 감정들이 누그러진 경험이 없진 않기 때문이다. 내민 손을 붙잡는 순간 손 끝에 전해진 체온이 그를 다시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부활시킨다.

나는 지금 용기를 모으고 있다.
먼저 손 내밀 용기.
거절을 감내할 용기.
어쩌면 이조차 무례와 폭력이라고 말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할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