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국의 한낮

by 이은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느낀 것은 따뜻한 기온이 주는 이완감이었다. 몇 주째 이어진 한파에 잔뜩 움추렸던 어깨가 조금 펴지는 그런 기분. 날씨말고는 크게 기억 남는 게 없겠다 싶은, 내가 지금 외국 여행 중인 건지 잠시 외출 중인 건지 구분 안 될 정도로 느슨하고 여유롭던 며칠 간의 나들이.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일정에 일요일이 껴 있던 건 순전 우연이었고, 우연히 마주한 이국의 한낮 풍경에 발걸음이 멈춰 섰다. 화려한 쇼핑몰이 즐비한 시내 중심가를 지나던 길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껌도 씹어서는 안 되고, 쓰레기를 버려서도 안 되고, 무단 횡단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공공장소에서는 음료수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인도 한 편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게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보다는 여자들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남자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젊은 (혹은 중년의) 여자들이었고, 각자가 싸온 것 같은 도시락을 펼쳐 나눠 먹고 있었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도 없는 이상한 피크닉. 근처에 교회나 사원이 있나? 아니면 특정 국가 이민자들이 일요일마다 모이는 장소일까? 공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적한 거리도 아닌데 돗자리를 깔고 앉은 여자들은 차량도 행인도 의식하지 않고 그들만의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내내 밥 냄새, 반찬 냄새가 났다. 근처 쇼핑몰 푸드코드가 얼마나 붐비는지 방금 보고 나온 터라 인도 위의 피크닉이 더 궁금해졌다.

재미나이는 너무 쉽게 답을 찾아준다. 더메스틱 헬퍼들이라고 했다. 싱가폴은 맞벌이 가정의 육아와 가사, 노인 돌봄 등을 위해 상주 도우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일요일은 헬퍼들의 휴식일이고 같은 국적의 사람들끼리 몇 군데 거리에 모여 점심을 함께 먹으며 교류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재미나이는 헬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의 내용, 계약 조건과 임금 수준, 숙소나 인권 문제... 다민족 국가인 싱가폴에서도 이국의 가사 도우미들은 열악한 처우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그녀들은 모든 고충을 참고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 나라에서 일하는 여러 직종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우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은 힘들고 타향살이는 서럽지만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은 타국에서 인생의 한 때를 보내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들의 월급은 가족들의 생활비, 교육비, 병원비로 쓰일 것이다.

여행 끝에 잠시 들린 역사 박물관에서도 짧은 싱가폴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들의 기여나 희생이 확대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화려한 도시 국가의 이면에는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의 피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싱가폴의 1인당 GDP는 9만 달러가 넘지만 노동인구의 30퍼센트가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은 이런 수치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저 좋은 날씨, 다민족 다인종 사람들의 어우러짐, 화려한 빌딩과 쇼핑몰, 잘 가꿔진 도시환경만을 눈에 담고 돌아왔어도 어쩌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루 수십만원이 넘었던 호텔, 한 끼 수만원이 넘었던 식사,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화려하고, 호화롭던 나라에서 나는 왜 하필 이런 풍경에 멈춰 섰을까. 아마도 오랜 외국살이의 기억이 나를 보듯 그녀들을 바라보게 했나 보다. 일요일 한낮 길거리에서 마주한 이름 모를 그녀들의 피크닉이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